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계진 Sep 03. 2020

나와 등산화와 아버지

내가 어릴 적부터 아버진 등산을 무척 좋아하셨다. 주말만 되면 꼭 산을 오르셨는데, 심심하면 하시는 말씀이 "산 타러 갈래?"였다. 그 말에 꾀여 몇 번 올라가기도 했다. 올라가는 건 그럭저럭할만했지만 내려오는 길은 정말 죽을 맛이었다.  정상까지 올라 짜릿하면 뭐하나. 내려올 때 후들대는 다리의 느낌은 너무 싫었다. 등산하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춘기가 오기도 전에 아버진 집을 떠났다. 종종 바깥에서 만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산을 권했다. 평소에 자주 보지 못하니 일요일에 등산이라도 하면서 얼굴이나 보자고 생각했나보다. 거의 매번 뿌리쳤지만, 번번이 거절하기도 민망해서 한두 번 따라간 적이 있었다. 한 번 가보겠다고 말만 했는데, 덜컥 등산화를 사다 주셨다. 그 등산화는 딱 그때만 썼다. 나중에 쓰려고 찾아보니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었다.


잃어버린 등산화처럼 아버지도 내 삶에서 점점 지워져갔다. 나이가 들수록 삶은 복잡해져갔고, 아버지의 이름은 다른 것들로 대체되어갔다. 내가 먼저 연락한 적은 거의 없었다. 대개 아버지가 먼저 연락을 걸어왔다. 대부분 술에 취해 자책감에 사로잡혀 미안하단 말과 후회한다는 말을 지겹도록 되풀이하는 전화였다. 반복되는 술 주정이 괴로워 성을 몇 번 냈더니 연락이 뜸해졌다. 아버지를 향한 복잡한 감정은 세월이 쌓이면서 조금씩 옅어져갔다. 시간이 흘러서 무뎌진 것일까. 아니면 나이가 들며 이해심이 조금 깊어진 것일까.


2년 전쯤 등산화를 하나 장만해야했다. 매달 산이나 바다, 강가에 갈 일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참에 운동 삼아 좀 걸어보자는 생각이 들어 큰마음 먹고 등산화를 사기로 했다. 그쪽 분야로는 아는 게 일천하여 등산을 좋아하는 아버지한테 오랜만에 연락을 했다. 등산화를 살 계획인데 혹시 아는 곳이 있으면 알려달라는 말을 건넸다. 아버진 무척 반가워하셨고, 만나자며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아버지는 많이 변해 있었다. 머리는 하얗게 세어있었고, 인상은 낯설었다.  아버지의 시간은 나보다 몇 배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제 함께 산 날보다 함께 살지 않은 날이 더 많구나, 새삼 느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아버지가 알고 있다는 등산 브랜드 상설할인점으로 가서 이것저것 따져보며 등산화를 골랐다. 내친김에 근처에 있던 용품점에서 무릎 보호대와 지팡이도 샀다. 저녁까지 먹고 집에 가려는데, 아버지가 잠시 자기 집에 들렀다 가라고 했다. 아버지와 떨어져 살기 시작한 후로 아버지가 사는 곳 근처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아버지도 자기 삶이 있지. 왠지 모르게 더 낯설었다. 집에 도착한 아버지는 밑에서 기다리라고 하고는, 잠시 후  뭔가 바리바리 싸 들고 내려오셨다. 등산할 때 필요한 잡다한 용품들이었다.


그날 사고 얻은 많은 용품들은 등산화를 제외하고는 거의 쓰지 못했다. 등산 한번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고질적인 무릎 통증이 길을 막았다. 보호대를 껴도 소용이 없어서 높은 산에 오르는 건 포기했다. 산에 오를 일이 없으니 다른 용품들이 별 쓸모가 없었다. 아버지가 등산을 좋아하는 이유는 영영 알 길이 없게 됐다.


그래도 평지를 걷는 건 괜찮아서, 등산화 신고 이리저리 참 많이 오다녔다. 매달 전국에 흩어져 있는 산과 바다, 강가에 다녀왔다. 집 바로 뒤가 산이라 종종 약수터에 가곤 하는데 그때마다 꼭 등산화를 꺼내 신었다. 조금만 멀리 갈 일이 있거나 행여나 흙을 밟을 일이 생기면 꼭 등산화를 챙겼다. 비행기를 타고 멀리 갈 때도 빼놓지 않았다. 재작년엔 중국 대륙을 거쳐 러시아 바이칼 호수까지 걸었고, 작년엔 일본, 지난 겨울엔 서유럽까지 다녀왔다. 종종 비가 오기도 하고, 질펀한 진흙을 밟을 때도 많았지만 새 등산화라 그런지 물이 새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막 신고 다녔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2년이 넘게 함께 한 등산화였는데, 이번 여름 여행 때 빗길에 신으니 발바닥에 물이 배어들었다. 숙소로 돌아와 신발을 벗으며 눈으로 확인하니 문득 외롭고 씁쓸해졌다. 아 이것도 결국 낡아버리는 거구나. 당연한 생각이 당연하지 않게 떠올랐다. 때론 까먹기도 할 정도로 신발장 구석에 오랫동안 처박혀 있다가도 필요할 때면 언제든 제 몸 내어주던 고마운 녀석이었는데, 이 아이도 늙어버렸다고 생각하니 괜히 서러웠다. 이 세상에서 나와 관계 맺고 살아가는 것들이 꼭 그만큼 낡아버린 것 같아서 가슴이 시렸다.

매거진의 이전글 우연히 만난 책방, 선물처럼 만난 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