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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Nov 19. 2020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나는 왜 쓰는가

일상이 숨돌릴 틈 없이 바쁘게 돌아갈 때면, 가만히 앉아 차분한 마음으로 하루 돌아볼 시간도 없이 그저 쉴 시간만 궁리하게 될 때면, 생활에서 가장 먼저 지워지는 건 글 쓰는 시간이다. 문장들이야 마음 내키는 대로 끼적여볼 수 있다 해도 한 편의 완성된 글은 꽤나 품을 들여야 하는 일이기에, 쉬어야 할 시간을 쪼개어 글을 쓸 틈이 나지 않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자주 그랬다. 그런대로 살면서 이따금씩 글을 생산해내다가도 삶에 여유가 고갈되면 글은 가장 먼저 떠나갔다.


글 따위야 쓰나 안 쓰나 큰일이 나거나 대단한 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닌데, 굳이 왜 하는 걸까. 때때로 괴로워하기도 하면서 말이다. 조지 오웰은 그의 유명한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글쓰기의 동기를 순전한 이기심, 미적인 열정, 역사적 충동, 정치적 목적 4가지로 정리했다. 글을 쓴다는 행위란 글이란 매체 안에 나를 담아내는 것이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는 것이고,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가 나와 무관하지 않음을 증명하려 드는 행위인 것이다. 글뿐만 아니라 대부분 인간의 창작물에는 이 각각의 동기가 조합된 형태로 숨겨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 서른 남짓이 되면 개인적인 야심을 버리고(많은 경우 자신이 한 개인이라는 자각조차 거의 버리는 게 보통이다) 주로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겨우겨우 살 뿐이다. 그런가 하면 소수지만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는 재능 있고 고집 있는 사람들도 있으니, 작가는 이 부류에 속한다.


After the age of about thirty they abandon individual ambition – in many cases, indeed, they almost abandon the sense of being individuals at all – and live chiefly for others, or are simply smothered under drudgery. But there is also the minority of gifted, willful people who are determined to live their own lives to the end, and writers belong in this class.


-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Why I Write)>에서 (이한중 번역) -


나이 서른 즈음엔 대개 자기 힘으로 밥 벌어먹고 산다. 생계를 책임진다는 건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며 살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세계에서 그 삶은 대개 실체가 불분명한 조직이나 체제와 내 시간을 거래하는 모양으로 드러난다. 그게 익숙해지면 나를 위한 시간은 점점 희미해진다. 남을 위해 살거나 고역에 시달리며 살거나. 겨우겨우 살아갈 뿐이다.


오직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끝까지 자기 삶을 살아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다. 재능까지 더해진다면 작가라는 칭호도 얻을 수 있으리. 이들은 없는 시간을 짜내고 쪼개어 자기를 위해 쓰고, 그 상태를 끝까지 밀고 나간다. 그런 삶이 보여주는 결과물들은 때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생동하게 한다.


여기 두 가지 길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걷는 길과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허락된 길. 어느 길을 택하든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테고, 세상도 그대로 일테다. 그 길의 끝이 어떨지 아는 사람은 적어도 내가 알기론 이 세상에 없다. 오직 하나 단언할 수 있는 건, 끝까지 자기 삶을 지키려 했던 이들의 흔적은 시간을 거슬러 살아남는 힘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시간을 견딘다는 건 지금 이 삶보다 더 나은 삶이 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때때로 지독하게 허무한 이 삶에도 살아갈 희망이 얼마쯤은 있다는 걸 뜻하기도 할테다. 한번 끝까지 고집부려볼 만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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