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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Sep 13. 2020

세상은 이해될 수 있을까

《이방인》, 알베르 카뮈

종종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매일매일 돌아가는 삶이 쳇바퀴처럼 느껴지고 그게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게 느껴지거나 늘 해야 하는 일들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고 느껴질 때면 깊은 고독감에 빠져든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어지거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버리거나 나만 홀로 증발해버리고 싶다는 생각도 따라온다. 오래전 십 대 때부터 종종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럴 때면 밤에 잠을 잘 못 이루지만 어김없이 해는 떠올랐다. 날이 밝으면 늘 하던 대로 몸을 움직였고, 삶은 계속 굴러갔다.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라고 썼다. 지독하게 귀찮고 힘겨운 삶을 지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질문을 품고 여러 책들을 파고들기도 했다. 책에는 저마다 삶에 대한 관점이 담겨 있어서 때론 내 마음을 위로해 주기도 하고, 없던 기운을 샘솟게 하기도 했다. 어떤 책은 읽으면서 내가 이해받는 느낌이 들기도 했다. 그럴 땐 세상이 살만하게 느껴졌다.

카뮈가 남긴 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이방인에는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뫼르소라는 젊은 남성이 등장한다. 소설은 “오늘 엄마가 죽었다”(p.9)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시작하자마자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는데, 의아한 건 그에게서 슬픔을 비롯해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뫼르소는 사무적으로 장례 절차를 치르고, 일상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간다. 한 여성을 만나 연애를 하고, 다소 무료하면서도 긴장감 있는 일상을 살아간다. 마치 아무 욕망도 없는 것처럼 말이다.

애인이 결혼하자고 하자 뫼르소는 아무 동요도 없이 승낙한다. 파리로 전근을 가볼 생각이 없냐는 사장의 말에 뫼르소는 인생에 어떤 변화도 추구하지 않는 인생관에 대해 말한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딱히 없는 그는 무채색 인간으로 그려진다. 그러다 뫼르소는 친구들과 놀러 간 휴양소에서 한 아랍인을 총으로 쏴 죽인다. 어떠한 이유도 없이, 후에 그저 “햇빛 때문이었다”(p.124)라고 설명하는 살인을 저지른다.

여기까지가 소설의 절반이고, 나머지는 법정과 감옥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법정에선 뫼르소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취조와 증언, 변호가 오간다. 검사는 뫼르소가 어머니의 장례식과 그 후의 일상에서 아무 동요 없이 지내던 모습을 밝혀내고, 배심원에게 뫼르소는 불효막심한 사이코패스 같은 비정한 사람이 된다. 법과 도덕의 잣대 아래 그의 삶과 행동이 이해될 가능성은 점점 영으로 수렴한다. 뫼르소의 말처럼 “내 의견은 듣지도 않은 채 내 운명이 조정되고 있었던 것이다.”(p.118)

뫼르소는 사형선고를 받은 후에 비로소 감옥에서 “평온을 되찾”(p.144)는다.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행복감을 느낀다. “나도 모든 걸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었다고 느꼈다. (…) 나는 처음으로 세상의 다정한 무관심에 마음을 열고 있었다. 세상이 나와 아주 닮았음을, 결국 형제 같음을 경험함으로써 나는 내가 행복했었음을, 그리고 여전히 행복함을 느꼈다.”(p.145) 대체 이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어쩌면 뫼르소는 이해될 수 없는 세상처럼, 자신도 이해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일찍이 눈치챈 것일까. 그러니 자신의 운명은 당연한 것이고, 죽음 앞에서도 초연할 수 있었던 것일까. 햇빛 때문에 누군가를 죽였다는 것이 누구에게도 이해될 수 없지만 자신에게는 자연스러웠듯이 사형집행일에 자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 또한 온전히 이해되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뫼르소는 어떻게 부서지지 않을 수 있었을까. 

※ 이 글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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