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박완서와 이문구의 소설을 읽거나 문태준의 시를 읽을 때면, 황현산의 문장을 곱씹을 때면 샘나고 부러울 때가 많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들을 바로 엊그제 있었던 일인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는 솜씨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난 아무리 어렸을 때를 떠올려봐도 기억나는 게 별로 없는데, 대체 어찌 그리 생생하게 기억하는 걸까? 부러웠다.
내 어린 시절의 기억들은 대개 사진처럼 단편적인 장면들로 남아 있다. 종종 옛 친구나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처음 듣는 것처럼 생경한 이야기를 만나곤 한다. 그러다 대화가 무르익으면 그제서야 기억이 떠오르는 것이다. 마치 저녁 어스름에 가로등이 반짝하고 켜지듯 뒤늦게 말이다. "나는 참 기억력이 나빠" 언젠가부터 이런 말을 무심코 내뱉고 다녔다.
김달님 작가의 『나의 두 사람』에는 "아이의 시간은 부모에 기억에 빚져 흐르나 보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내가 존재했던 시간들이지만 정작 내 기억 속엔 없는 장면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한때의 내가 그들의 기억 속"에 살아 있고, 지겹도록 들려준 "이야기들" 속에 살아 있다는 것이다. 혹시 내겐 어린 시절을 채워줄 이야기가 별로 없는 건 아닐까?
어렸을 때 우리 집은 이야기가 넘쳐나는 화목한 집은 아니었다. 아버진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집을 나갔고, 엄마는 그 뒤로 중노동에 시달리셨다. 어린 내 눈에 비친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고생 많은 엄마'였다. 아침 일찍 일어나 두 형제가 먹을 밥을 지어놓고, 밀린 빨래를 하고 여느 직장인들과 비슷한 시간에 공장으로 출근하셨다. 그곳에서 하루 종일 옷을 만들고 집에 돌아오면 저녁 뉴스가 끝날 시간이었다. 성수기엔 토요일에도 평일처럼 일을 했고, 하루 이틀 쉴 수 있는 주말엔 밀린 잠을 보충하는 게 일상이었다. 빽빽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 추억이 들어설 틈은 없었고, 이야기가 숨쉴 공간도 없었다.
어느 때는 어린 시절의 일들이 분명 머릿속에 들어있는 것 같은데, 마치 무언가에 봉인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집에서 아버지'란 이름은 금기어가 됐고, 아버지가 사라진 집에서 옛날 일들은 더 이상 입에 오르내르지 않았다. 나도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는데 엄마는 오죽했을까. 우리 모두 과거를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예 기억이 없는 건 아니다. 온 친척들이 함께 유원지로 피서 간 기억, 시골 마을에서 메뚜기 잡고 놀았던 기억, 유치원 친구네 가족들이 시골집에 놀러 와 바비큐 파티를 한 기억, 여름방학 때 내장산에 캠핑하러 갔던 기억 등등 좋은 기억들도 단편적이나마 분명히 있다. 하지만 나쁜 기억은 더 많고 생생하고 선명하다. 거의 매일 술에 취해 들어왔던 아버진 엄마에게 쉽게 폭력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형과 나는 방구석에 숨죽여 있어야 했다. 어떤 날은 아버지를 뺀 세 식구가 외갓집으로 도망치기도 했다. 지겹게 반복됐던 가정폭력에 진저리가 났다. 작은 곰팡이균이 음식 전체를 상하게 하는 것처럼 나쁜 기억이 모든 기억을 오염시킨 것 같았다.
기억이란 무엇일까? 애니메이션 영화 <코코>는 사후세계를 그리는데, 저승의 혼령들은 이승의 산 자들이 추모해 주어야 이승으로 여행을 떠날 수 있다. 만약 시간이 흘러 이승에서 아무도 죽은 혼령을 기억하지 않게 되면 혼령은 완전히 소멸된다. 영화에 따르면 존재는 기억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의 세계에 존재한다는 건, 내 기억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기억은 중요한 일일 테다.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지 않는다면 슬프겠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린 시절 그토록 고생했던 엄마는 누가 기억해 주나, 생각하니 너무 슬펐다. 내 소중한 사람을 내가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누가 기억해 줄까. 그래서 그 시절 엄마는 내가 열심히 기억해 줘야겠다. 그리고 지금 내 곁에서 숨 쉬며 살아가고 있는 내 소중한 사람들도 열심히 기억해야겠다. 그것이 함께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주어진 작은 의무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