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동 벽화마을, 어제와 오늘
내 생애 최초의 기억이 담긴 집은 달동네의 단칸방이었다. 문을 나서면 바로 눈앞에 한양도성의 성곽이 보였고, 옆에는 성곽 너머로 갈 수 있는 작은 굴다리(암문)*가 있었다. 옆집은 구멍가게였다. 가게 앞에는 누구나 쉬어갈 수 있는 의자와 원형 탁자가 있었는데, 동네 형과 그곳에 앉아 딱지를 접어 놀기도 했더랬다.
좁은 골목길은 세발자전거를 타고 마음껏 누비던 공간이었고, 동네 친구들과 함께면 축구장이 되거나 술래잡기, 얼음땡, 와리가리 놀이터가 됐다. 가을이 되면 또래 아이들 무리에 껴 잠자리채와 채집통을 들고 성곽길을 따라 돌며 잠자리를 잡으러 다녔다. 무리를 주도했던 이는 나보다 세 살이 많았던, 동네에서 바보로 불리던 형이었다. 그땐 그냥 재밌게 어울리면 그만이었다. 처음 보는 아이와도 쉽게 어울렸다.
성곽은 어린 내 눈엔 미지의 세계였다. 바로 반대편이 낭떠러지란 사실이 두렵고 아찔했다. 아주 어렸을 땐 목만 빼꼼 내밀어 겨우 반대편만 바라봤다. 그러다 차츰 자라나 담력이 생겨 성곽 위에 걸터 앉아보기도 하고, 나중엔 성곽 위를 마구 뛰어다니기까지 했다. 어느 여름날에는 집이 너무 더웠는데, 아직 초등학생이던 나는 새벽에 혼자 집에서 나와 성곽길에 있는 벤치에 누워 잠을 청하기도 했다. 성곽길은 내 유년 시절을 함께 한 친구였다.
중학교 3학년 때, 태어나 계속 살던 동네를 떠나 처음 멀리 이사를 갔다. 새로 살게 된 집은 아파트였고, 주변이 온통 아파트로 가득한 베드타운이었다. 자로 잰 듯 정확한 크기로 규격화된 집들과 도로들 사이엔 성곽길처럼 특별한 멋을 느낄 만한 것이 없었다. 공원이 군데군데 있었지만 인위적인 조형물로 대충 공간을 채워 만든 곳뿐이었다. 이제 제법 나이도 들었는지 공부에 집중하느라 친구들과 추억을 쌓을 시간은 없었다. 동네가 때때로 삭막하게 느껴졌고, 옛 동네가 그리웠다.
스무 살이 되던 무렵, 옛 동네는 낙후된 도심지역을 재생한다는 명분으로 곳곳에 벽화가 그려져 벽화마을이 됐다. 티브이 프로그램 <1박 2일>을 비롯해 여러 예능 프로그램에 소개되기도 했다. 무심코 본 티브이에서 익숙한 곳이 나오니 무척 반가웠다. 마을은 이제 관광명소가 되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됐다. 인터넷에 검색하니 사진촬영 명소로 유명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인증샷을 남겼다. 내 눈에 익숙한 골목길을 다른 사람들의 사진에서 보니 기분이 묘했다.
이십 대 중반 군입대하기 전에 옛 추억을 더듬어 보고 싶어 오랜만에 동네를 찾아갔다. 어렸을 때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하굣길을 따라갔다. 어렸던 내가 멀게 느끼던 거리와 한없이 높게 느꼈던 계단들은 짧고 작게 느껴졌다. 벽면과 계단마다 그려진 벽화들이 낯설었다. 종종 들르던 구멍가게는 카페가 되어 있었고, 음식점도 몇 군데 생겼다. 한 벽면엔 날개 문양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이 사진 포즈를 취한 후로는 수많은 관광객들의 인증샷 장소가 되었나보다. 한쪽 구석엔 마을 주민이 작성한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이곳은 사람이 사는 곳입니다. 술 마시고 밤늦게 떠들지 마세요.>
그 후로 한참 뒤에 한 언론사의 기사**로 동네 소식을 접했다. 벽화가 그려진 지 10년 정도 흐른 뒤인 2016년에 마을 주민들이 ‘시끄러워 못 살겠다’, ‘편히 쉴 권리를 달라’, ‘주거지에 관광지가 웬 말이냐’는 문구로 벽화를 뒤덮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벽화를 훼손한 주민들은 재물손괴죄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무엇을 위한 도시 재생인 걸까 싶었다.
삼십 대 초반, 결혼하기 전에 한 번 더 찾아간 동네는 더 ‘힙한 곳’이 되어있었다. 예전에 찾았을 때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선 곳은 단칸방이 있던 성곽 주변부보다 한 단계 아래쪽이었는데, 이젠 더 윗동네인 성곽의 큰 길가에 줄지어 카페와 음식점이 들어서 있었다. 음식점으로 변한 집 중 한 곳은 내 친구가 살던 집이었다. ‘서울성곽둘레길’의 일부가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많이 미치게 되면서 바뀐 풍경이었다. 벽화들이 일부 지워진 곳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더 세련되어졌고 수는 많아진 듯했다. 곳곳에는 <쉿! 주민이 살고 있어요>라는 표지판이 붙어 있었다. 이제 아예 지자체에서 작정하고 관리하는 것 같았다.
그곳에서 더 이상 옛 정취를 느끼긴 힘들었다. 조용하고 평화롭던 풍경은 화려한 간판과 차가운 조명들로 바뀌어 있었다. 그나마 마을이 송두리째 없어지지 않은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할까. 오래전에 옆 동네엔 아파트 단지가 잔뜩 있었는데 낙산공원이 조성되면서 싹 헐렸다. 그곳에도 많은 친구들이 살았는데, 다들 어디로 떠나갔을까.
인터넷 창에 ‘이화동 벽화마을’이란 키워드를 쳐보니 <도시재생 관점에서 지속 가능한 이화동 벽화마을에 관한 연구>란 제목의 논문이 검색된다.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마을이 그렇게 변한 것도 이상한데,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니 더 이상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도시재생이란 무엇일까. 주민들이 살기 힘든 마을이 된 곳에서 무엇이 지속 가능하단 걸까. 혹시 저 지속 가능이란 말의 주체는 사람이 아니라 자본인 걸까. 마음이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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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그냥 굴다리로만 불렀는데, '암문'이라는 표현을 쓰나 보다. 다음 링크에 나온 암문이 바로 본문에서 말했던 곳이다. 변해버린 골목길 모습도 담겨있다.( https://news.joins.com/article/24060393 )
** “벽화 훼손 1년, 인적도 지워진 벽화마을”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201704110438878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