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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May 24. 2022

초여름 밤바람의 온도


오랜만에 야근을 하고 평소보다 세 시간 정도 늦게 지하철에 올라탔다. 전철 안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나처럼 야근을 끝내고 돌아가는 듯한, 지친 기색이 역력한 사람들이 먼저 눈에 띄었다.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수다 떨며 돌아가는 무리들도 곳곳에 있었는데, 그 소란스러움과 적막함이 공존하는 풍경이 괜스레 쓸쓸하면서 정겨웠다.


퇴근시간이 지나 헐렁해진 배차 간격 때문에 집 근처 역에는 다소 늦게 도착했다. 보통 역에서 내리면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타고 가지만 오늘은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이 밤공기에 잠겨보고 싶었다.


입하도 지난 5월의 어느 날, 낮은 꽤나 덥지만 아침과 밤은 제법 쌀쌀했다. 반팔을 입고 걷기엔 공기가 살짝 차가웠다. 그렇다고 가방에 욱여넣은 카디건을 꺼내 입긴 싫었다. 이 기분 좋은 선선함과 약간 불편한 서늘함 경계에 걸친 공기를 느껴보고 싶었다. 운이 좋으면 이따금씩 불어오는 바람의 결을 오롯이 느껴볼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동네 골목길의 상점들은 한두 집 빼곤 대부분 문을 닫았다. 명절 때 말고는 쉬지 않는 단골 카페 주변과 내부는 정갈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공간도 주인을 닮아가는 걸까. 늘 한결같은 주인장의 성실함과 꾸준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주택가 골목길에 자리했지만 수십 년 전통을 잇고 있는 감자탕 집 출입문엔 사장님을 비롯해 몇몇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이야기가 오갔는데, ‘오늘 하루도 끝났구나’ 하는 안도감 섞인 웃음이 사장님 얼굴에서 시작되어 주변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작년 가을쯤 새로 생긴 청과물 가게엔 별다른 간판 없이 <○○청과>라는 현수막이 간판 자리에 걸려 있었다. 어두운 공기가 가게 안에 드리워 있었고, 푸릇한 과일과 채소들은 숨죽이고 있었다. 어딘가 낯설게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청과물 가게 옆엔 핸드폰 대리점이 있었다. 이 동네에 7년여 살면서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던 곳이다. 점포 안엔 직원인 듯 사장인 듯 누군가 앉아서 일을 보고 있었다. 주변 가게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았는데 어쩐 일로 남아 있는 걸까. 3사 통신사를 모두 취급하는 핸드폰 대리점이, 지하철역에 내려서도 마을버스를 십분 넘게 타고 와야 하는 깊숙한 동네에 자리 잡은 것도 신기한데 꽤나 오랫동안 운영되고 있는 것도 새삼 신기했다.


골목길에 딱 하나 있는 분식집은 하루를 마감하는 손길로 분주했다. 주방을 정리하는 사장님 뒤편에 단골손님들이 막걸리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저녁시간에 분식집을 지나치면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가게를 정리하는 사장님이나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손님들이나 모두들 저마다의 방식으로 하루를 마감하는 의식을 치르는 것 같았다.


종종 택배를 찾거나 부치곤 하는 편의점 앞도 지나쳤는데, 점장님이 밖에 나와 있었다. 점장님은 가게 문을 열어둔 채 맞은편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10평 정도 되는 비좁은 편의점에 온갖 상품들과 함께 온종일 머무르며 노동하는 삶이 문득 궁금했다. 점장님은 얼마나 많은 밤을 뜬 눈으로 지새웠을까. 나에겐 당연한 밤이 누군가에겐 당연한 게 아니겠거니 괜히 한번 생각해 본다.


편의점을 지나니 이제 주택가가 빼곡히 자리한 골목길들이 이어졌다. 이제 집도 거의 다 와간다. 고개 하나만 넘으면 집이다. 지하철역에서 걸어오며 느낀 바람은 쌀쌀했지만 때론 기분 좋게 선선했고, 이따금 따뜻하고 푸근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마 동네 길 걸으며 마주친 여러 얼굴들 때문이리라.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치 바람에 실려 집까지 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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