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계진 Aug 19. 2021

이성 대신 도래한 삶

1~2. 『죄와 벌』, 도스또예프스끼

『죄와 벌 』 초판(왼쪽)과 열린책들 번역본(오른쪽)


1860년대 후반 러시아, 청년 로쟈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두통, 망상에 시달리다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살해한다. 돈이 궁해서 벌인 일은 아니었다. 그저 헛된 정의감과 혐오감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살해한 일이었다. 이후 법망은 로쟈를 촘촘히 조여온다. 로쟈는 극도의 신경쇠약에 시달려 영혼이 무너질 것 같이 혼란스러워하다가도 어떤 때는 능숙한 범죄자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기도 한다.


죄책감이 가져다준 두통과 고열은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늪 속에 빠져든 로쟈를 구해내는 건, 그를 둘러싼 관계들이다. 오빠인 로쟈를 위해 원치 않는 결혼을 결심했던 동생 두냐, 로쟈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낸 어머니, 로쟈의 순수했던 옛 모습을 기억해 주고 믿음을 잃지 않았던 친구 라주미힌. 이 관계들은 로쟈가 스스로 무너지지 않도록 지켜주던 생명선이었다.


종국엔 사회에서 가장 하찮게 여겨지던 창녀 소냐가 로쟈를 구원한다. 번번이 자수할 결심을 하다가도 그 결심을 배반하던 로쟈에게 소냐는 비로소 '대지를 마주하는 법'을 알려준다. 로쟈는 비로소 자기 죄를 마주할 용기를 얻고, 마침내 "변증법 대신 삶이 도래"한다.


로쟈는 이성의 신봉자, 이성의 화신이다. 계몽시대 유럽의 마지막 사람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 그는 이성을 잘 활용하기보다 이성의 굴레에 매여 그 안에서 스스로 무너진다. 이성으로 완전한 세상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시대, 로쟈의 기획은 처절한 실패로 드러난다.


오히려 그를 구원하는 건 이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관계와 삶이다. 『죄와 벌』에 따르면 삶은 언제나 이성보다 크다. 나로 가득한 이성을 내려놓을 수 있을 때, 로쟈와도 같이 구원이 찾아올 수 있을까. 세계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친 후 이성 자체에 대해 회의하고 새로운 기획을 내놓는다고 하지만, 지금 은 어느 때보다 유례 없이 개인의 이성이 판을 치는 시대다. 로쟈의 방황과 구원이 여전히 의미 읽게 읽힐 수 있는 이유다.


매거진의 이전글 세계문학을 읽어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