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계진 Dec 23. 2021

최초의 인간, 무한의 가능성

3. 『최초의 인간』, 알베르 카뮈



마흔 살 자크는 그 자신의 의지에서가 아닌 순전히 어머니의 청에 이끌려 아버지의 묘지를 방문한다. 묘지에 도착한 자크는 묘비를 바라보며 문득 (그가 한 살일 때 전쟁터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나이보다 지금 자신의 나이가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 생각은 순간 그의 뇌리를 치고 몸속 깊이까지 동요를 일으킨다. 그는 마침내 오랫동안 탐구해왔던 어떤 비밀 앞에 도착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수많은 책들과 존재들을 통해서 미칠 듯이 알고자 노력해 왔던 바의 그 비밀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여기 묻혀 있는 사자, 그보다 나이 어린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과거 및 됨됨이와 어느 면 관련되어 있는 것이며 또 자기 자신은 시간상으로 보나 핏줄로 보나 바로 가까이에 있는 것을 먼 데서 찾아 헤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크는 비밀을 캐기 위해, 자신의 뿌리와 원천을 찾기 위해 지난 삶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옛 동네를 찾아 아버지를 기억하는 이들을 만나고, 자신이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고 자라왔는지 유년 시절을 톺아본다. 자크가 마주한 건 아버지 없이도 그를 살아가게 했던 존재들, 헌신적인 어머니와 생활력 강한 할머니, 친근한 삼촌과 친구, 작가의 길을 걷게끔 도와준 선생님이다. 그들은 어린 자크의 빈 공간을 채워줬고, 자크가 꿈을 갖고 살아가도록 도와주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자크는 꿈을 잃지 않았고, 자기만의 길을 개척해왔다. 주변인들은 자크에게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자크가 걸어온 길의 증언자들이기도 하다.


뿌리 탐구의 결론은 바로 우리 모두는 '최초의 인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 속에서 우리는 최초의 인간들이다. 신문들에서 외치듯이 몰락해가는 사람들이 아니라 불확실하고 다른 어떤 새벽의 사람들이다." 최초의 인간들, 새벽의 사람들. 모든 인간은 그 자신의 세계에서 스스로가 최초의 인간이다. 이 점에서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그 앞엔 무한의 가능성이 펼쳐져 있다.


평범하게 살다가도 문득 내 뿌리에 대해 궁금해지는 때가 있다. 대개 풀리지 않는 문제에 직면할 때, 혹은 삶의 문제가 해석되지 않을 때, 나도 모르는 힘과 기운이 내 삶을 사로잡고 있다고 느낄 때가 그러하다. 마냥 좋을 땐 의식조차 않고 지내다가도 음울할 때 불현듯 찾아오곤 하는 불청객 같은 순간들이다. 내가 어디서 왔을까, 란 질문은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란 질문과 다름없고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까, 란 질문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삶의 순간들에서 최초성을 자각할 수 있다면, 그 안에 내재된 가능성에 몸을 맡겨볼 수 있다면 현재의 삶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이 책은 미완성 원고라기보다 초고에 불과한 책이다. 퇴고를 염두에 두고 의식의 흐름대로 써나간 문장들은 마치 프루스트의 미로 같은 문장을 연상케 한다. 곳곳이 빈칸으로 남아 있어 가독성도 떨어진다. 하지만 이야기의 핵심은 쓰여 있기에 카뮈의 의도는 짐작해 볼 수 있고, 거듭 읽어보면 그 안에 담긴 날것의 에너지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자기 삶을 무에서 다시 세워보고자 하는, 그래서 이 부조리한 삶을 몽창 긍정하고자 하는 삶의 에너지랄까. 그 힘을 느끼기 위해서라도 충분히 읽을 가치 있는 책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이성 대신 도래한 삶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