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굴레에서》, 《인생의 베일》, 《면도날》을 읽다
지난 6월부터 9월까지 하나의책 문학모임에서 서머싯 몸의 소설 3권, 《인간의 굴레에서》(1915), 《인생의 베일》(1925), 《면도날》(1944)을 읽었다. 내 마음대로 서머싯 몸 3대 장편 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왜 《달과 6펜스》가 없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다. 《달과 6펜스》 또한 널리 알려진 작품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유독 많이 읽히는 듯싶다. 영미권 최대 북리뷰 사이트 Goodreads에 별점 평가가 가장 많은 건 앞서 언급한 세 작품이고, 《달과 6펜스》는 네 번째에 위치해있다. 물론 평가 수로 작품의 질을 가릴 순 없고, 가장 널리 읽힌 3대 장편소설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참고로 평가 수는 인간의 굴레에서 > 면도날 > 인생의 베일 순으로 많고, 평점은 면도날 > 인간의 굴레에서 > 인생의 베일 순으로 높다. 물론 어디까지나 재미로 참고할 만한 데이터다.)
https://www.goodreads.com/author/show/4176632.W_Somerset_Maugham
모임에서는 《인생의 베일》→ 《면도날》 → 《인간의 굴레에서》 순으로 읽었는데, 순전히 분량을 기준으로 정한 순서일 뿐이다. 처음부터 2권짜리 두꺼운 책을 읽기는 부담스러우니 얇은 것부터 차근차근히 읽어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민음사 판을 기준으로 《인생의 베일》은 약간 얇고, 《면도날》은 다소 두껍고, 《인간의 굴레에서》는 두툼한 2권짜리다.
작품별 특징을 살펴보자면《인생의 베일》은 빠른 전개가 돋보이고, 《면도날》은 사건의 서술보다 풍부한 묘사, 특히나 사건과 세월을 겪으며 달라지는 인물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어느 한쪽에 치우치지 않은 고른 서술이 돋보인다.
세 작품 모두 결말 부분은 다소 희망적이지만 작품의 전체적인 톤들은 다 다르다. 《인생의 베일》이 마치 깊은 밤의 칠흑 같은 어둠 같다면, 《면도날》은 새벽 어스름처럼 어두우면서도 밝은 느낌, 《인간의 굴레에서》는 아침에 내리쬐는 밝은 햇살 같은 작품이랄 수 있겠다. 시대순으로 가장 젊을 때 쓰인 《인간의 굴레에서》가 가장 밝고, 인생의 쓴맛을 경험한 《인생의 베일》이 가장 어두운데 이 두 가지 톤을 조화시켜 인생의 풍부한 모순들을 조명한 《면도날》에 도달한 걸까.
세 작품 모두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면 각각의 책마다 작가 나름의 철학과 인생관이 꽤나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에 영향을 받은 듯한 인생관이 담겨 있는데, 허무를 오히려 긍정적인 것으로 생각을 전환하여 삶의 철학을 정립한다. 《인생의 베일》엔 동양철학의 도道에 관한 이야기가 꽤나 의미심장하게 담겨 있으나 작중 인물을 통해 승화되진 못했고, 또 다른 한 축으로는 수도원 수녀를 통해 표상되는 기독교 신앙이 있다. 《면도날》은 한 장章을 할애하여 인도철학에 대한 개괄적인 소개를 꽤나 자세히 다루고 있고, 작중인물을 통해 체화된 형태로 나타난다.
작가의 크고 작은 경험들이 반영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할까. 《인생의 베일》은 홍콩 여행을 바탕으로, 《면도날》은 인도 여행을 바탕으로 쓰였고, 《인간의 굴레에서》는 어린 시절과 청년기의 자전적인 내용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새로운 것과의 만남은 작가가 영감을 얻는 주요 원천이었나 보다.
또 다른 원천은 다른 텍스트들이다. 세 작품 모두 제목은 다른 텍스트에서 따왔다. 《인생의 베일(The Painted Veil)》은 19세기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시에서 따왔고(작품 자체는 단테의 《신곡》에서 영감을 받아 쓰였다), 《면도날》은 힌두교 경전 <카타 우파니샤드>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인간의 굴레에서》는 본래 성서 이사야서를 참고하여 '재속에서 나온 미인'이라고 지으려던걸,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한 장 제목을 따와서 지었다.
개인적으로 세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갔던 건, 서머싯 몸의 자서전적인 소설인 《인간의 굴레에서》다. 그 당시 유행했던 '교양소설'로 고아에다 절름발이인 필립이란 아이가 청년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진솔하게 담겨있다. 첫 문장은 '희끄무레하게 날이 밝았다'로 시작해 마지막 문장 '햇빛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로 끝나는데, 그 사이에 담긴 필립의 여정은 끝내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주인공의 행동이 때때로 이해할 수없이 답답하고, 생각은 앞뒤가 맞지 않는 점도 많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생의 의지가 오롯이 느껴져서 좋았다. 필립의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 의지만은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인생의 베일》은 다시 읽을 것 같진 않다. 아무래도 원숙한 시기에 쓰인 《면도날》은 작품성이 가장 뛰어나다. 여러 인물들의 흥망성쇠를 통해 미국이라는 나라를 형상화한 솜씨가 훌륭하고, 인물과 상황, 풍경 등 풍부한 묘사가 일품이다. 역사(세상)와 개인 간의 관계라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주제를 다룬 점도 좋았다. 서머싯 몸 본인이 작중 화자로 등장하는데, 거리 두기를 통해 드러내는 방식이 설득력도 있고, 뭔지 모를 삶의 여백이 깃든 것 같은 여운의 미감도 좋았다.
끝으로 서머싯 몸에 대해 잠깐 논해보자. 몸은 에세이 《서밍업》에서 언급했듯이 당대에 실험적인 기법을 선보인 제임스 조이스나 버지니아 울프 등의 작가들에 비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이는 그가 소설의 기술에 관심을 갖거나 새로운 기법을 창안하는 데 노력을 기울이기보다 전통적인 기법을 고수한 데 있고, '소설은 곧 이야기'라는 신념을 일관되게 믿고 따른 결과였다. 그는 일생에 걸쳐 문체를 갈고닦았는데, 오직 이야기를 잘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몸은 언제나 이야기의 힘에 대한 믿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런 그를 가리켜 대중적인 작가, 통속적인 작가라는 평이 많지만 그는 이런 평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나는 에둘러서 완곡하게 말하는 작가가 되기보다는 차라리 통속적인 작가가 되겠다. 인생은 통속적이고, 작가가 추구하는 것은 인생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곧 이야기라고 본 그의 단순한 통찰엔 오래된 진리가 담겨 있다. 그는 틀리지 않은 듯하고, 그가 이뤄낸 성취는 여전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제국의 시민이자 젠트리로 평생을 살아갔던 몸 자신의 시선을 크게 벗어나진 못했다는 점이었다. 시대의 한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섣불리 판단할 수도 없는 문제지만 그의 소설은 주로 상류층과 교류하는 중산층 사람들과 장소들이 주를 이룬다. 첫 소설 《램버스의 리자》에서 의사 실습생 시절 만났던 빈민층에 대한 이야기를 다뤘다고는 하나 전반적으로 노동 계급이나 빈민층은 거리감이 있다. 그가 17세기나 18세기를 살았다면 아쉽다고도 느끼지 않았겠지만 그의 시대는 대전환의 시대가 아니었던가. 불과 30년 후에 태어난 조지 오웰이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과 제국시민으로서의 부채감을 여러 글을 통해 드러낸 것과 비교했을 때, 그의 글은 확실히 기름기가 껴있다. 그가 동양을 대하는 방식도 좀 마뜩잖다. 동양을 섣불리 대상화하지 않고 사려깊게 접근하지만, 서양의 발전과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서 동양을 대했다는 점에서 글러먹은 방식이 아닌가 싶다. "그 시대의 풍습에 따라 글을 써야 한다"던 그의 말이 아예 틀린 건 아니나 시대를 훌쩍 넘어서기엔 분명한 한계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