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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계진 Dec 26. 2022

어느 연말의 밤


올해 마지막 독서모임을 끝마쳤다. 독서모임 후에는 조촐하게 송년회를 했다. 한 회원분은 깜짝 선물까지 준비해 주셨다. 황송했다. 송년회 때는 여러 이야기를 나눴는데, 각자 돌아가며 올해의 사건을 나누기도 했다. 어떤 일들이 있었나 곰곰 생각해 보니 한 해가 꽤나 길구나, 새삼 깨달았다. 길고 긴 시간들, 소중한 하루하루들인데 어쩔 땐 "시간 참 빠르다"란 말로 퉁치고 넘어갈 때가 많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공감하지 못하는 바 아니나 그만큼 대충 살아가는 건 아닐까, 괜스레 생각해 본다.


송년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철 자리에 겨우 앉았다. 맞은편에는 한 외국인 여성분이 앉았는데, 앉자마자 책을 꺼내 읽었다. 영어책이었지만 한눈에 무슨 책인지 알 수 있었다. 우리말 번역본과 표지가 똑같았고 꽤나 특이한 제목의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 책은 바로 《WHY FISH DON'T EXIST》,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였다. 우연히 이 책을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몇 달 전이었던가 어느 버스에서 누군가 가방에서 꺼내 읽는 걸 본 적이 있다. 특이한 제목에 끌려 인터넷으로 검색해봤고, 전자책에 다운로드해놓기도 했다. 한두 챕터 정도만 읽고는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집으로 돌아가면 다시 다운로드해 읽어야지.' 때론 이런 우연이 책을 읽게 한다. 소소하고 반가운 일이다.


밤이 깊었는지 지하철 바로 맞은편에는 한 취객이 몸을 못 가누고 서 있었다. 툭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아슬아슬 휘청거렸다. 열차가 흔들릴 때마다 몸(몸집이 평균 이상이었다)이 크게 흔들렸고,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승객은 몇 번 얼굴을 찌푸리고 레이저빔을 쏘다 도망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취객은 어찌어찌 그 자리에 앉았는데, 한 정거장 두 정거장 지날수록 움직임은 더욱 커졌고 결국 옆자리의 승객들도 차례대로 자리를 떠났다. 네 다섯 정거장 정도 지나고 나니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취객은 그대로 자리에 널브러진 채 열차에 몸을 맡겼다. 제 몸을 못 가누는 취객을 보고 어느 승객은 격하게 웃기도 했다. 무엇이 그렇게도 웃긴 걸까. 경박하게 느껴졌다.


독서모임의 밤, 송년회의 밤, 우연한 만남의 밤, 취객의 밤, 경박한 웃음의 밤. 무어라도 이름 지을 수 있을 어느 연말의 밤. 해가 저물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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