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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Jul 31. 2023

나의 간절한 꿈이 당신에게는 한낱 쓰레기였군요

2010년쯤 있었던, 10여 년도 전의 이야기지만 지금 대화 하나까지 똑똑히 기억나는 1월의 추운 어느 날이었습니다. 1년 선배가 새로 들어온 신입들과 술을 한잔하고 싶은데 저도 같이 갔으면 하는 눈치였습니다. 회사 앞 치킨집에 자리를 잡은 저희는 신입들의 생기발랄함 덕에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술이 얼근하게 취하자 선배는 자기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신입들! 니들 홈쇼핑 PD로 왜 들어왔냐? 홈쇼핑 이제 가망 없어~"


갑자기 왠 뜬금없는 소리냐 생각은 들었지만 그 시기 저도 회사 일로 힘들 때여서 무언의 동조를 보냈습니다. 제 반응에 더 신이 났는지 선배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홈쇼핑 PD 뭐 있냐? PD라 말하기도 민망하고 근무 시간도 불규칙하고 주말 수당 빼면 월급도 쥐꼬리만 하고. 나는 늦었지만 너희는 진짜 지금이라도 딴 일 알아봐라 "


"에이 선배님 그래도 회사는 돈 잘 벌잖아요. 탄탄하면 좋은 거죠 뭐"


괜히 민망해서 한마디 거드니 선배는 더 열변을 토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도 이제 몇 년 지나면 갈 데도 없어. 홈쇼핑 PD가 할 줄 아는 게 뭐 있냐. MD가 상품 가져다주고 쇼호스트가 다 팔아주는데 뭐 하는 게 있어? 나도 어떻게든 빠져나갈 궁리하고 있으니까 니들도 후회하기 전에 다른 기회 있나 잘 봐. 홈쇼핑 PD 진짜 쓰레기야"


밤늦도록 말을 이어가던 선배를 말리고 자리를 마무리했습니다.

선배는 택시를 타고 사라졌고 후배 하나는 아빠가 데리러 온다며 손을 흔들었습니다.

회사 근처에 살던 저와 비슷한 방향인  신입과 길을 걷는데 한동안 말없이 걷던 신입이 길 한가운데서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큰 소리로 서럽게 울어대는지 지나가던 사람들이 고개를 돌릴 정도였고 어떤 사람들은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처럼 안 좋게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너무 당황해서 급히 다독이며 대체 왜 우는 거냐 물어봤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저는 진짜 옛날부터 홈쇼핑 PD가 되고 싶었어요. 저희 삼촌이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시는데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가 홈쇼핑 채널 활용해서 매출 크게 일으키고 좋은 조건으로 다른 회사에 인수되었거든요. 그때 삼촌이 홈쇼핑 이야기를 정말 많이 했고 그때 홈쇼핑 담당 직원분들이 너무 좋아서 아직도 안부 연락한다고 해서 진짜 홈쇼핑에서 일해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2년 동안 준비하고 탈락도 하면서 만에 겨우 PD로 들어와서 너무 행복하고 잘해봐야지  생각했었는데.. 제 간절했던 꿈이 누군가에게는 쓰레기라는 게 너무 슬퍼요"


울먹거리며 말을 이어가는 신입을 들여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 역시 회사에 불만이 많았을 때라 SNS 등에 조만간 퇴사해 버린다, 너무 힘들다 따위의 감정을 배설하던 때

였습니다.


저 역시 누군가의 꿈일 수 있는 직업을 스스로 비하한건 아닌가 정말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물론 이 일에 경험이 쌓이면서 저는 홈쇼핑 PD라는 직업에서 보람을 찾았고 그에 보답하듯 이 직업은 저에게 작가, 강연가, 사업가 등의 소중한 기회를 선사했습니다.


홈쇼핑 PD가 쓰레기라던 선배는 아직도 홈쇼핑 업계에 몸 담고 있고 홈쇼핑 PD가 꿈이었다던 신입은 지금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는 게 하나 신기한 점이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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