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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Mar 26. 2024

채소는 싱싱! 고객은 콜콜!

예전에 홈쇼핑에서 시도한 구독형 상품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때 소개했던 채소 구독 상품과 관련한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어 소개하려고 합니다.


어느 날 인사팀과 고객서비스팀에서 저를 찾았습니다.

예감이 아주 좋지 않았습니다. 

인사팀과 고객서비스팀의 조합이라니!

분명 제가 방송한 상품을 받은 고객이 한참 동안 컴플레인을 했을 것입니다.


어쩌다 한 번씩 있는 일이지만 그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저는 또 구구절절 제가 어떻게 방송을 했고 어떤 부분에서 고객이 오인을 했는지, 제가 오인할 여지를 줬는지 설명할 생각에 얼굴을 찌푸리며 회의실로 들어갔습니다.


인사팀 매니저와 고객서비스팀장이 나란히 앉아있는 회의실의 분위기는 역시나 자리에 앉기가 두려울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어떤 방송이었나요? 혹시 몰라 최근 방송 큐시트를 뽑아 왔습니다만"


저의 질문에 둘은 합이라도 맞춘 듯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답답해지려는 찰나 고객서비스팀장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피디님. 얼마 전에 콜센터로 고객 전화가 한 통 왔습니다. 혹시 몰라 녹음을 했는데 들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고객의 불만 가득한 전화 내용을 듣고 나면 왠지 더 우울해질 것 같았지만 제 방송을 보고 상품을 구매한 고객의 목소리라고 하니 차마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재생해도 될까요?"

"... 네"


고객서비스팀장의 노트북에서 고객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얼마 전에 방송으로 채소 정기적으로 보내주는 거? 그거를 구매했어요. 아니 근데 내가 살다 살다.."


저는 급히 재생을 멈춰달라고 말했습니다.


"잠깐만 멈춰주세요. 심각한 정도로 치면 어느 정도일까요? 소비자보호원이나 방심위 넘어갈 정도인가요?"


마침 회사의 홈쇼핑 사업자 재심사가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저의 신경도 잔뜩 예민해졌습니다.


"일단 끝까지 들어보시죠"


고객서비스팀장이 다시 재생을 눌렀습니다.


"아니 근데 내가 살다 살다 이렇게 마음에 드는 상품은 처음이에요. 채소가 어쩜 그리 싱싱하게 배달이 왔는지 내가 마트 가서 산 것보다 좋아요. 진짜 아침에 따서 오후에 보내준다더니 너무너무 만족했어요. 제가 어지간하면 이렇게 전화 안 하는데 꼭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요. 같이 보내준 삼겹살도 맛있고 채소랑 같이 먹으니까 조합도 좋더라고요. 이거 꼭 자주 방송해주세요"


늘 듣던 불만에 가득 찬 목소리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듯 즐겁게 상품에 대한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하는 고객의 목소리가 회의실을 가득 채웠고 저는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제 표정을 본 인사팀 매니저와 고객서비스팀장이 그제야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피디님 너무 긴장하신 거 아니에요? 뭐 잘못하신 거 있습니까?"


"이게.. 저희 회사로 고객이 한 전화라고요?"


"네네.. 저희 콜센터에서 너무 신기해서 저희 고객서비스팀에 보고를 해줬고 오늘 아침에 제가 듣게 되었어요. 저도 홈쇼핑 15년 가까이 있으면서 이런 전화는 처음입니다 하하"


"인사팀 매니저님은 왜 오셨습니까...?"


"아 저는 이번 방송 진행하신 분들 명단이 필요해서 왔습니다. 뭐 작게라도 포상이 있지 않을까요? 고객 경험 측면에서 너무 좋은 케이스라.."


"채소야 업체분이 수확하셔서 잘 보내주신거고 고기랑 같이 구성하는 건 엠디분이 아이디어 내신 거고.. 뭐 저도 당황스럽기는 한데 잘되었네요"


"저희 이번 재심사 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 같습니다. 고생 많으셨어요 피디님"


회의실을 나오며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피디로서의 직업병이 도져 다시 회의실로 들어갔습니다.


"그 녹음 파일 제가 방송 때 좀 써도 될까요? 글로 남기는 고객 리뷰나 별점보다 더 강력한 한방 같아 보여서요"


"네네. 제가 고객님께 여쭤보고 말씀드릴게요"


고객님의 생생한 목소리는 그 뒤로 아주 유용하게 방송에 쓰이게 되었고 방송 때마다 밀려들어오는 주문량을 감당하지 못한 업체의 결정으로 더 이상 방송을 진행하지는 못했습니다.


이커머스 업계에 종사하면서 기분이 울적할 때면 아직도 그분의 목소리를 떠올려봅니다. 상품이 너무 좋아 참지 못하고 전화를 한 고객의 심정을 생각하면 울적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기도 합니다.


좋은 상품은 획기적인 상품도 아니고 첨단 기술이 들어간 상품도 아니고 엄청난 가성비를 자랑하는 상품도 아닙니다. 그저 고객이 받아봤을 때 기분 좋은, 그런 상품이 좋은 상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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