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건강한 남자라면 가야 하는 군대를 나도 피할 수 없었다.
훈련소에 입소한 나는 누구나 그러하듯 훈련을 받고 실수를 하고 얼차려를 받았다.
그곳에서는 '대부분' 평등했다.
군대에 왔다면 공부를 잘하든 집안이 좋든 다 똑같은 훈련병일 뿐이었다.
나는 적응을 쉽게 하지 못했다 아니 적응을 하기 싫었다.
쾌락의 극치인 대학생활을 즐기다 절제의 극치인 군대에 온 것 자체가 불쾌했다.
영혼을 다른 곳에 두었다 생각하자 여기저기서 펑크가 났고 조교들의 호령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112번 훈련병! 집중합니다!"
"죄송합니다""112번 훈련병! 똑바로 합니다!"
"알겠습니다""112번 훈련병 불만 있습니까?!"
"네.. 아 아닙니다"
각 잡힌 훈련도, 현실에서는 꿈도 못 꿀 실탄 사격도, 훈련 후 달콤한 간식에도 설레지 않았다. 아무리 잘난 슈퍼맨도 대한민국의 군대 앞에서는 꼼짝을 못 하는 것 같았다.
그 훈련 전까지는.
군대의 훈련이 모두 육체적으로 하는 것만은 아니다. 교양 수업처럼 강당에 모여서 강사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날씨가 무더워지기 시작한 어느 날 점심시간 이후 교양 수업이 시작되었다. 날씨, 빵빵한 배, 지루한 내용이 기막힌 콜라보를 이뤄 조교들의 경고에도 많은 훈련병들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 이것을 뜻하는 사자성어입니다. 그리고 비슷한 뜻의 사자성어를 20개 준비해 왔습니다"
강사의 강의를 계속되었고 화면 가득히 한자로 된 사자성어가 나타났다.
"이 사자성어 20개의 뜻을 다 아는 훈련병 있습니까? 있어요? 없나요?"
식곤증에게 판정패를 당하여 고개가 숙여지던 내 눈에 그 사자성어들이 크게 들어왔다.
초등학교 시절 부모님이 '따개비 한문숙어'라는 책 세트를 사주셨다. 만화로 되어있고 수많은 사자성어를 재치 있는 상황에 빗대어 알려주는 그런 책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유를 모르겠지만 당시에 나는 그 책들이 해질 때까지 반복해서 읽었다. 버리자는 부모님을 말리고 테이프로 붙여가며 보고 또 봤다.
중학교에 진학하며 그 책들은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내 기억에서도 사라졌다. 10년도 더 된 그 책의 기억이 갑자기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사자성어 20개가 매우 익숙하게 느껴졌고 조용히 나타난 슈퍼맨은 내 손을 들었다.
"훈련병? 이 사자성어들 뜻을 다 알아요? 정말이에요?"
20개 사자성어 뜻을 이야기해 주며 시간을 끌까 했던 강사는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다소 지루한 강의에 긴장감을 더하는 훈련병이 기특한지 참관하던 장교가 한마디 거들었다.
"112번 훈련병! 사자성어 다 맞추면 전화 5분 부여합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내무반 간식도 허용합니다"
강당에 있던 모든 훈련병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고 특히 같은 내무반을 쓰는 전우들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오비이락은 까마귀 날자 배가 떨어진다는 말로.."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단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20개 사자성어의 뜻과 예시까지 쏟아내었다.
".... 다 맞았습니다"
잠시 침묵 끝에 나의 말이 다 맞았음을 강사가 확인해 주었다.
그리고 내무반 전우들의 환호성이 쏟아졌다. 그날 나는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전화 5분은 물론 내무반에서 달콤한 간식을 즐겼다. 입소 후 처음으로 웃음이 나왔다. 지금 생각하면 저게 왜 그렇게 화제가 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사건과 함께 내가 명문대 출신이라는 소문까지 합쳐져서 그때부터 훈련소 최고의 브레인이라는 오해를 사게 되었다. 같은 내무반 훈련병들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찾아와 뭔가를 묻고 답을 얻어갔다. 나를 마뜩잖게 여기던 조교들의 태도도 많이 달라졌다.
그러던 어느 날 훈련교관이 나를 찾았다.
"112번 훈련병 오늘부터 내무반 전체를 통솔하는 소대장으로 임명한다"
"아..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혼란스럽습니다"
"훈련병은 군사훈련 종료 후 부대에 배치되지 않는다. 곧바로 훈련 조교로 활동할 것이다"
당시만 해도 하늘과도 같던 조교들이었기에 내가 일반 병사가 아닌 조교가 된다는 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내가 훈련병들을 지도하고 얼차려도 주고 그런 권력을 갖게 된다고? 그 뒤 시간 날 때마다 몰래 조교들이 와서 나에게 교육을 해주기 시작했다. 마치 벌써 조교가 된 것 같았다. 갑자기 소대장이 된 나를 보고 내무반 전체가 의아해했지만 소문을 빨라 벌써 나는 조교님으로 불리고 있었다.
하지만 군사훈련이 종료된 5주 차에 나는 생각지도 못한 부대의 기관총병으로 배정이 되었다. 조교들도 황당해하고 나도 크게 놀랐다. 나에게 처음 조교를 제안했던 교관은 그 뒤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그 이유는 모르겠다. 그 조교 자리는 연대장과 아빠가 친구라는 훈련병에게 돌아갔고 나에게 약속되었던 수료식 후 외출도 그 훈련병 차지였다.
그렇게 훈련 힘들기로 유명한 부대의 기관총병으로 아주 평범하게 군생활을 시작했다. 훈련하고 아침저녁으로 선임에게 혼나고. 사회에서 예상했던 군대 생활과 한치도 다름이 없었다. 어느 날 저녁 점호가 끝나고 당직사관이 나를 불렀다.
"너 신방과 출신이지? 영상편집 할 줄 아니?"
"네 프로그램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이거 우리 대대장님 영상인데 사단에 제출을 해야 하는 거라 잘 만들어야 하거든"
"몇 시간만 주시면 만들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당직사관과 행정실에서 밤을 새우며 영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졸리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분명 슈퍼맨의 힘이 돌고 있었다.
아침 점호가 시작되기 직전 영상은 완성이 되었고 당직사관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와 함께 CD를 가지고 사라졌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일이 터졌다. 그때 당직을 맡았던 하사가 허둥지둥 나를 찾아왔다.
"빨리 전투복 입어.. 대대장님이 찾으신다"
일개 이등병을 대대장이 찾을 이유가 무엇일까?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하사와 함께 거의 뛰다시피 대대장실을 찾았다.
"자네가 그때 이 영상을 만들었나?"
"네 맞습니다"
"이 영상을 사단에서 보고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이런 퀄리티 영상을 나도 본 적이 없어.. 문제는.. 사단장님이 자네를 꼭 데려오라고 하는데.."
"사단장님과 회의가 생긴 것입니까?"
"아니.. 자네는 내일부터 사단 본부 소속으로 영상 담당 병사가 될 거야"
일개 중대의 기관총병이 갑자기 사단 본부 소속으로 영상을 담당한다고?
뭔 소리인지 이해를 하려고 노력하는 그 순간 대대장은 친절하게 도움을 주었다.
"지금 내려가서 짐을 싸게"
그렇게 나는 내무실 인원들과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사단으로 소속을 옮겼다.
그리고 연병장 대신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소위 중위가 아닌 장군들을 상대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힘든 훈련도 열외가 되었다.
나는 사단 영상 뉴스를 새롭게 기획을 했고 매달 사단장은 그 영상 퀄리티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나름 편안하고 우아하게 군생활을 마쳤다.
별별 이유로 외출과 휴가를 다녀온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슈퍼맨 정말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