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 대표님 한번 만나보실래요? 아주 뵙고 싶어 합니다"
어느 날 아이들 교육 프로그램을 서비스하는 중견기업의 담당자가 불쑥 내게 말했다.
"대표님을요?"
"네네 좀 이런저런 조언도 구하고.. 암튼 뵙고 싶답니다"
비즈니스 목적으로 이런저런 사람 만나는 게 내 일이다 보니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그렇게 만난 대표는 예상대로 나에게 라이브커머스 시장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고는 때로는 희망찬 표정을 때로는 굉장히 찌푸린 표정을 지으며 고심하는 눈치였다.
"저희가 새롭게 아이들 교육 관련 서비스를 론칭하는데 이게 좀 어렵습니다. 막상 해보면 좋은 걸 아는데 상세페이지 정도로는 그 장점을 참 전달하기가 어렵네요. 그래서 방송 형태인 라이브커머스로 좀 서비스를 실제로 보여주면서 판매를 해보려고 합니다"
"일단 시청자를 모으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송출할 플랫폼도 문제고"
"네 저희가 전문가가 없다 보니 진행도 안되고 좀 답답합니다. 뭘 알아야 할 텐데"
그렇게 대화가 마무리되어갈 때쯤 대표는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혹시.. 저희 회사로 와주실 수는 없을까요? 꼭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소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당황했지만 나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서비스는 너무 매력적이고 소비자들도 그 가치를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현재 시점에서 라이브커머스로 판매를 한다는 건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제가 그럴만한 능력은 없는 것 같습니다"
"연봉은 무조건 지금보다 높게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회사 임원으로 모실게요. 사무실, 법인카드 무엇이든 지원하겠습니다"
"제가 그럴만한 인재는 아닌데.. 일단 좀 고민해 보겠습니다"
사실 고려해 볼 만한 사항조차 아니었다. 신규 서비스를 처음부터 키워서 안정적인 매출을 올릴 수 있게 안정화시킨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의외로 내 마음을 돌린 건 대표의 간곡한 부탁도, 연봉도 아니었다. 바로 아이의 존재였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를 보며 아이와 관련된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다. 게다가 선진 교육 프로그램이라니.
대표가 공유해 준 서비스를 다시 돌리고 또 돌려봤다. 아이가 좋아하는 모습에 마음이 약해졌다. 이 서비스를 내가 키울 수 있다면, 그리고 언젠가 아이가 본격적으로 이 교육으로 공부할 수 있다면 뿌듯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대표님. 합류하겠습니다'
대표에게 메시지를 남기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전화기를 끄고 깊은 잠에 빠졌다.
기대와 불안이 합쳐진 피로가 나를 짓눌렀다.
입사 첫날. 대표는 나를 반기며 말했다.
"말씀드렸던 그 처우들 전부 변동 없이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만 사무실은 따로 필요 없습니다. 같이 일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30대 중반을 막 통과한 나이에 중견기업의 임원이 되었다.
슈퍼맨의 힘은 한계가 없었다.
야심 차게 론칭한다는 교육 서비스를 자세히 뜯어봤다. 교육 프로그램으로서는 손색이 없었지만 판매를 할 '상품'으로서 가치는 제로에 가까웠다.
서비스의 가격 책정 기준을 알아보니 어떠한 원가 계산이나 경쟁 서비스 비교 없이 대표의 감이었고 적어도 내가 볼 때는 터무니없는 가격이었다.
오직 교육 프로그램만을 제공하는 형태도 구매자의 입장에서 아주 매력 없었다. 부가 서비스나 구성도 큰 변화가 필요했다.
브랜딩도 전혀 되어있지 않아 세상에 본격적으로 나왔을 때 관심을 가질 고객이 하나도 없을 것 같았다.
한마디로 아무것도 갖춰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명확한 증거로 현재 돈을 내고 이 교육 서비스를 이용하는 일반 고객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정도였다. 대부분 무료 이벤트 이용 고객 혹은 대표의 지인들이었다.
상품의 특장점을 다시 재정립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자녀가 있는 고객들이 어떤 점에 끌릴까 생각하며 외국의 교육 프로그램까지 샅샅이 조사하여 우리만의 특색을 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상세페이지를 처음부터 다시 제작했다. 상품의 자랑보다는 이 서비스를 이용했을 때 아이가 어떤 가치를 얻을 수 있느냐에 집중했다.
여기까지 진행하고 문득 실제 고객들의 반응이 어느 정도일까 궁금해졌다.
빠르게 모 플랫폼에서 방송을 진행했다.
생소한 브랜드와 서비스였기에 고객들의 질문도 많았고 처음 판매해 보는 우리도 여러 시행착오를 겪었다.
매출과 고객의 반응에서 일말의 희망을 봤고 고객들의 피드백을 바탕으로 서비스와 그것을 소개하는 방식을 계속 다듬어갔다.
어느 정도 준비가 되었다고 판단이 되자 네이버, 쿠팡 등 자력으로 입점할 수 있는 모든 플랫폼에 입점을 하고 생소한 서비스인 만큼 1회 이용권을 만들어 같이 노출을 시작했다.
판매를 시작했으면 그것을 지원할 마케팅도 필요했다.
눈여겨보던 정부지원사업을 신청하고 PT를 통해 당당히 선정이 되었다. 우리는 마케팅 비용 하나 들이지 않고 수 회의 라이브커머스는 물론 신문사 옥외 광고, CF 영상 제작 등을 진행할 수 있었다
.
아이들 교육에 특히 관심이 많은 카페와 협업하여 공구 이벤트도 진행했다. 수수료가 들기는 했지만 빠르게 온라인에 퍼지게 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공구 이벤트를 통해 매출은 물론 사용 후기까지 상당수 확보할 수 있었다.
아이들 놀이 관련 이용권을 판매하는 앱과 제휴하여 우리 교육 프로그램을 앱에 노출했다. 판매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실제 우리의 타깃 고객들에게 꾸준히 노출되는 효과를 얻었다.
그렇게 실제 판매와 마케팅이 맞물려 돌아가자 조금씩 매출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네이버와 쿠팡에서는 고객들이 반응을 보이자 우리에게 기획전이라는 특전을 제공했다.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다고 판단이 들자 스마트스토어 자사 몰을 통해 자체 방송을 시작했다. 궁금해하는 시청자들이 계속 모이고 또 누군가는 이 새로운 서비스에 관심을 보이며 구매를 했다.
절대적인 숫자는 볼품 없었지만 매출은 어느새 J커브를 그리고 있었다.
매주 진행되는 임원회의에서 나는 늘 주인공이었다.
한 주간 진행된 성과에 대해 말할 시간이 늘 부족했고 대표는 매번 감탄했다.
가끔 다들 이 조직처럼 일하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그러고 나면 임원 한둘씩은 내 자리로 찾아와 협업거리를 찾으려고 했다.
나는 정말 슈퍼맨이었다.
어느 날 대표가 나를 호출했다.
"이제 상품이 본격적으로 고객들에게 노출되기 시작하니까 마케팅이 절실하네요. 그래서 이번에 마케팅을 총괄해 줄 임원을 영입할 겁니다. 혹시 몰라 먼저 어떤 분인지 알려드리고 싶어서요"
대표가 보여준 약력을 훑어봤다.
모르는 회사의 모르는 영역 출신이라 내가 딱히 첨언할 것이 없었다.
그저 마케팅 전문가와 와준다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되지 않아 대표는 마케팅 총괄이사가 출근을 했다며 간단히 미팅을 해보라는 말을 전했다.
나는 지금까지 진행된 것에 전문적인 마케팅이 더해진다면 얼마나 더 빠르게 성공할 수 있을지 부푼 기대를 안고 그를 만나러 갔다.
"일주일 정도 회사 내부 사정을 파악하느라 인사가 늦었습니다"
그는 씩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리고 눈을 가늘게 뜨고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맡고 계신 조직이 사실상 매출을 책임지고 있는데.. 아무리 봐도 매출이 너무 안 나오더라고요?"
첫 만남에 개소리도 유분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악취가 느껴졌다.
양치를 하지 않은 그의 입에서 나는 악취였는지 이제부터 시작될 내 몰락의 악취였는지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