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책 없는 퇴사 같았지만 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지금껏 나의 이직은 모두 스카웃을 통한 이직이었다. 한마디로 가만히 있었음에도 이직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이직에 소극적이었음에도 와달라는 회사가 많았는데 내가 적극적으로 구직 활동을 하면 러브콜이 얼마나 쏟아질지 가늠이 안되었다.
신입사원 이후 처음으로 진지하게 이력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가 생각해도 눈부신 커리어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또 얼마나 좋은 회사들이 나를 데려가려고 경쟁할지.
취업 플랫폼에 이력서를 올려두고 기분 좋게 잠에 들었다. 밤 사이 쏟아질 제안들을 기대하면서.
뭔가 잘못됐다.
일주일이 지나도 제안은 커녕 내 이력서를 조회한 회사가 하나도 없었다.
이상한 마음에 혹시 내가 이력서 저장을 하지 않았나 확인도 해보고 구직 중임을 표시하지 않았나 체크도 했다.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한 달이 지났다. 몇몇 처음 들어보는 회사들과 헤드헌팅 회사들이 내 이력서를 조회했지만 아무런 제안이 없었다.
'그래. 이제 나도 좀 적극적일 필요가 있어'
나는 제안을 기다리기만 하는 내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자존심을 굽히고 직접 입사 지원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누구나 들으면 알법한 회사의 내 주전공 포지션 채용 공고들을 골라 직접 입사 지원을 했다. 까다롭게 고른 3군데의 회사였고 나름 큰 결단이었다. 내가 입사 제안도 아니고 입사 지원을 통해 취업을 하려고 하다니.
나는 3군데 모두 합격을 가정하고 출퇴근 거리나 복지 등을 확인하며 혼자 어디를 갈지 고민하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 지난 후 내가 지원한 모든 회사에서 회신이 왔다. 볼 것도 없이 합격이겠지.
"아쉽게도 이번 채용에서는 모시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비슷한 내용으로 모든 회사가 나에게 불합격을 통보했다.
충격이었다. 혹시 내 이력서에 큰 오타라도 있는 걸까. 전혀 없었다.
그냥 오로지 나 그 자체로 평가받았고 나 그 자체로 거부당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같은 업종에서 일하는, 친분이 있는 인사담당자에게 전화를 했다.
"이제 저도 슬슬 다시 움직여볼까 하는데 요즘 채용 시장이 어떨까요? 하하하"
"일단 지금은 다니시는 회사 열심히 다니세요. 이쪽 업계가 코로나 때 좀 장사된다고 사람들 막 뽑았다가 그 이후로 성장이 정체되어서 다들 골치 아파하고 있어요. 회사들 기조도 새로운 전략이나 성장보다는 몇 년은 이대로 버텨보자 라서 아마 신규 채용을 해도 저연차 실무 돌릴 친구들만 원할 거예요"
"큰 회사들은 좀 다르지 않을까요?"
"큰 회사들이 더 심하죠. 지금껏 해오던 게 있는데 숫자들이 쭉쭉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이거든요. 오죽하면 다들 신입 공채도 없앴겠어요"
받아들이기 힘들었지만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었다. 지금껏 따뜻한 온실 속에서 뛰어놀던 나에게는 더욱 차갑게 느껴졌다.
이제 가릴 것이 없었다. 취업 플랫폼에 들어가서 회사 이름과 규모를 따지지 않고 내가 가능한 직무가 있으면 닥치는 대로 입사 지원을 했다. 그럼에도 마음 한편에는 이 정도 눈을 낮췄으면 이제 선택지가 많이 생기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내 생각이 틀렸음을 확인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든 회사들이 발 빠르게 나에게 불합격 통보를 했다. 한껏 자세를 낮춰도 나에게 면접조차 허락하는 회사가 없었다.
기세등등하게 회사를 나왔지만 그 누구도 찾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절실하게 슈퍼맨의 힘을 찾았지만 긴 잠에 빠졌는지 어디론가 휴가를 갔는지 그것은 전혀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저희 회사 지원을 해주셔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몇십 개의 회사에 지원한 끝에 처음으로 나를 보겠다는 회사가 나타났다. 처음 들어보는 동네에 있는 작은 회사였지만 처음으로 면접 기회를 잡은 나는 한달음에 달려갔다.
대표는 본인들의 사업과 내가 맡을 업무에 대해 꽤나 길게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처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제가 공무원 출신이라 저희 연봉은 공무원 연봉 테이블을 기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원자님 연차를 고려해서 저희가 제안드리는 연봉은.."
귀를 의심할 정도로 (내 기준에서) 처참한 제안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으며 조금 생각해 보겠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유난히 멀고 힘들었다. 갑자기 내 인생이 왜 이렇게 바뀌었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휴대폰 진동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안타깝게도.. "
"우수한 역량에도 불구하고.."
"금번 채용 공고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안녕하세요? 아쉽지만 이번에는.."
취업 플랫폼에서 열심히 나에게 나의 몰락을 알려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