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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Aug 29. 2024

19화 술은 나의 몰락을 더욱 응원했다

나는 태생적으로 아침형 인간이었다. 그리고 관리직으로 일하면서 새벽형 인간으로 변신했다.


매일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명상이나 독서, 영어공부를 마친 뒤 출근을 하는 것이 나의 루틴이었다.


일찍 일어나다 보니 저녁에는 9시 정도만 되면 자연히 눈이 감겼다. 책을 좀 보다가 대부분 10시 내외에 잠이 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저녁 약속은 최대한 금요일과 주말로 미루고 술 약속도 어지간하면 거절하거나 가볍게 마시고 끝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나에게 넘치는 시간이 생겨버린 것이다. 

처참한 내 마음과는 별개로 출근을 하지 않는 일상은 내게 이른 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팽팽했던 끈이 끊기면 축 쳐지듯이 갑작스러운 퇴사는 나의 긴장감을 끊고 느슨한 일상을 만들었다. 물론 마음 편하게 지낸 건 아니지만 새벽 다섯 시에 기상하던 루틴이 깨지니 자연스럽게 체력이 남아돌았다.


밤까지 정신이 말똥 했고 나름 비통한 일까지 생겼으니 당연한 것처럼 점점 술에 손이 갔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신세를 한탄하며 마시던 술이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었다.


늘 아픈 머리를 감싸며 일어났지만 오후만 되면 또 술 생각이 났다.


지금껏 지원한 모든 회사에서 탈락을 했다. 치욕스러운 마음에 술을 한잔했다.

조직원 하나가 회사에서 얼마나 짐짝 취급을 당하고 있는지 토로했다. 화나는 마음에 같이 술을 한잔 했다.

갑자기 내 신세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슈퍼맨은 어디로 갔는지 믿기지가 않았다. 허탈한 마음에 술을 한잔 했다.

예전 회사 후배가 연락을 해왔고 나는 있는 힘을 다해 괜찮은 척을 했다. 부끄러운 마음에 술을 한잔 했다.

친한 지인을 만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나의 불안과 무력감에 대해 털어놓았다. 후련함에 술을 한잔 했다.


이렇게 매번 이유와 핑계는 있었다. 오래간만에 풀린 나사는 쉽게 조여지지 않았다. 정신은 늘 몽롱했고 취한 느낌이었다.


어떤 날은 술에 취해 이력서를 쓰기도 했고 아픈 머리를 간신히 참으며 면접을 보기도 했다. 신경을 잔뜩 써도 될까 말까 한 취업 시장에서 술 취한 지원자를 받아줄 회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 핑계로 나는 또 술을 찾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멀쩡한 정신으로는 한없이 낮아지는 나의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혼자 여행을 떠났다. 머리를 식히면 좀 나아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무작정 바다로 차를 몰았다. 

파도치는 것을 보면서 생각도 좀 하고 정신없이 달려왔던 내 커리어도 정리해 보자고 마음먹었다.


차 안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 따사로운 햇살, 잔잔한 음악 소리. 

잠시나마 망가졌던 내 삶을 충분히 바로잡을 수 있는 분위기였다.


먹을거리를 사러 잠시 들른 마트에서 나는 축하주라며 술을 한 병 샀다. 

바다를 보며 다시 힘을 낼 나를 응원해 줄 도구라고 생각했다.

바다 근처에 차를 대고 트렁크를 열고 망망대해를 바라보았다. 

규칙적으로 들리는 파도소리, 끊임없이 드나드는 바닷물, 뛰어다니는 작은 아이들, 서성이는 갈매기. 

모든 것이 너무 평화로웠다.


나는 오늘부터 다시 굳게 마음먹고 내 커리어를 이어갈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정신을 차리니 술 세병이 뒹굴고 있고 나는 트렁크에 뻗어있었다. 

사방은 어두컴컴했고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다시 조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잠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나에게 남은 건 숙취로 불편한 속 밖에 없었다. 

기분 전환이나 새로운 결심 따위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어느 날 내 소식을 들은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소식 들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대체?"

"뭐 그렇게 됐다. 창피하니까 길게 얘기하지 말자"

"한잔 마시자. 나와"


그렇게 지인의 흔한 위로를 들으며 막걸리를 연거푸 들이켰다.


비틀거리며 탄 지하철에서 점점 기억이 사라져 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내려야 할 역에서 한참을 지나쳤다. 

겨우 반대편 지하철 승강장으로 가서 다시 꺼져가는 정신을 붙잡고 또 붙잡았다.


집에 겨우 도착해서 씻고 옷방에 옷을 벗는 순간 모든 기억이 사라졌다.

옷방에 쓰러진 나는 그대로 구토를 했다. 

그리고 그 위에서 그대로 다시 잠이 들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내 눈에 보인건 조용히 내 토사물을 치우고 있는 아내의 모습이었다.

아내는 묵묵히 청소를 마치고 나의 얼굴을 닦았다.


"왜 여기서 자고 있어? 얼른 방에 들어가서 자"


아내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분노도 경멸도 없었다. 

그저 무너져가는 남편에 대한 걱정스러움만 가득했다.

만취한 상황에서도 일말의 부끄러움이 느껴졌다.


다음 날부터 나는 거짓말 같이 술을 끊었다. 

다시 맑은 정신으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 준비를 했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마음을 고쳐 먹고도 수많은 난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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