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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Dec 06. 2019

홈쇼핑 PD의 대화법

* 현직 PD와 호스트들이 홈쇼핑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해보는 팟캐스트를 운영중 입니다. 

   http://www.podbbang.com/ch/1773539 

호스트가 48시간 동안 3개의 방송을 진행했다. 호스트의 말을 빌리자면 20시간 동안 회사에 있었던 상황. 그와 다음 주에 방송이 있기에 부득이하게 회의를 잡았다. 이제 좀 쉬나 했던 호스트의 난감한 목소리에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최대한 빨리 끝내겠다는 약속을 했다. 호스트들에게 무리한 스케줄을 요청하는 걸  싫어하지만 협력사의 스케줄을 맞추려다 보니 방법이 없다. 호스트를 겨우 달래 가며 회의실로 갔지만 MD와 협력사가 약속한 시간보다 조금 늦는 바람에 호스트의 표정은 더욱 굳어졌다. 호스트의 이런 상황을 MD와 협력사는 전혀 알 리가 없으니 회의 분위기가 어색해지지 않게 내가 나선다. 평소보다 더 많은 농담과 상품에 대한 질문, 방송 준비 관련 사항 등을 쉴 새 없이 이야기하고 회의를 끝냈다. 정말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호스트를 보내자마자 MD에게서 전화가 온다.


"PD님 아까 회의 때 호스트분은 왜 그렇게 말씀도 없으시고 의욕 없어 보이셨는지요? 굉장히 당황스러웠어요"

"호스트가 어제 아침부터 오늘 아침까지 방송을 여러 개 하느라 굉장히 피곤해했어요. 그리고 아무래도 제가 선배이다 보니까 제 의견을 경청했던 것 같아요. 이견이 있으면 뭔가 말을 했을 텐데 다행히 의견이 맞았나 봐요"

"그런 거죠? 아까 계속 마음에 걸려가지고 제가 뭐 실수했나 해서"


무리한 스케줄로 한껏 예민해진 호스트와 본인의 상품에 열정을 보이지 않는 호스트의 모습에 언짢은 MD 사이에서 나는 서로의 입장이 난처해지지 않게, 그러면서도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이유를 제시하며 회의 때부터 얼어있던 분위기를 녹이려고 애쓴다.


홈쇼핑 PD에게 가장 중요한 역량은 방송을 멋지게 하는 것도, 영상을 화려하게 만드는 것도, 상품을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홈쇼핑 PD에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적절한 대화 능력이다. 일반적인 방송국 PD들보다 훨씬 빨리, 어린 나이에 입봉을 하여 방송에 대한 책임을 지고 매일같이 새로운 협력사와 MD를 만나야 하는 홈쇼핑 PD의 특성상 대화를 잘한다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방송을 하게 되면 방송 스탭들과 자주 만나게 되는데 이 스탭들과의 관계가 굉장히 묘하다. 방송을 진행하고 적절한 지시를 내리는 것은 PD이지만 대부분의 스탭들이 PD들보다 경력이나 경험이 더 많기 때문이다. 방송을 조금이라도 더 멋지게 연출하려는 PD의 의욕이 스탭들에게는 경험 없는 자의 만용으로 보이고 스탭들의 우려가 PD들에게는 나이 많은 자의 고집으로 보인다. 때로는 이런 서로의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해 고성이 오가거나 긴장 관계가 형성될 때도 있다. 이 때도 스탭들의 기는 살려주면서도 필요한 것은 얻는 PD의 대화 능력이 중요하다. 나는 평균보다 더 많은 방송 준비가 필요할 때나 지금껏 해보지 않은 연출이 필요할 때는 방송 전부터 너스레를 많이 떠는 편이다.


"아 오늘 제 방송 감독님이 담당하세요? 아 다행이다. 오늘 잘 나오겠다. 아 방송 걱정이 없겠네요. 오늘 연출할 때 필요한 작업 이거 감독님만 할 수 있는 고유 기술 아니에요?"


이런 이야기를 미리 해버리면 스탭들은 안 하고 싶던 일도 할 마음이 생겨버린다. 이런 식으로 스탭들을 다독이며 수많은 방송을 큰 트러블 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

 

협력사와 만날 때도 홈쇼핑 PD의 대화 능력은 중요하다. 그들의 상품에 대한 자부심을 건드리지는 않으면서 그 상품이 홈쇼핑 방송에 적합한지에 대한 냉정한 평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홈쇼핑 PD들은 방송 회의 전 해당 상품에 대해 미리 검색을 해본다. 

얼마 전 한 브랜드 의류 방송을 할 때였다. 생각보다 상품의 가격을 고가로 책정한 탓에 판매가 잘 될지 의문이었다. 일단 협력사와의 관계를 부드럽게 하기 위해 나의 패를 먼저 보여준다.


"이 브랜드 백화점에도 있고 유럽 브랜드지요? 제가 좀 알아보니까 한국인이 좋아하는 의류 브랜드 TOP 10에도 들더라고요. 고객들이 방송으로 이 브랜드 보면 엄청 좋아할 것 같아요"


혹여나 내가 모를까 봐 브랜드 대한 이야기를 잔뜩 준비해온 협력사는 내가 먼저 자신들의 브랜드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꺼내자 표정이 확 밝아진다. 신이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는 끝까지 맞장구치며 경청한 뒤 내가 제일 필요로 하는 이야기를 정중하게 꺼낸다.


"아 진짜 제 개인적인 의견인데요. 정말 상품은 좋은데 홈쇼핑 특성상 가격이 조금 고객들에게 부담스러울 수 있어요. 혹시 구성을 조금 늘리고 개당 가격은 조금 낮추는 건 어떨까요?"


기쁘게까지는 아니지만 납득한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하자는 협력사의 말에 비로소 마음을 놓는다. 

만약 내가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면?


"아 이 브랜드는 제가 처음 듣는데 설명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가격이 비싸서 홈쇼핑 방송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 같아요. 가격 좀 내리시죠"


아마 협력사와 굉장히 불편한 관계가 되었을 수도 있다. 중간에 있는 MD는 난처함은 물론이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까지 머리를 굴려가며 대화에 신경 쓰냐고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결국에는 최종 의사결정과 책임까지 져야 하는 홈쇼핑 PD로서 생존하기가 어렵다. 저자세로 양보하다가 정말 필요할 때는 강하게 이야기하기,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나의 불쾌함을 드러내기, 상대를 추켜세우면서 나의 실리 챙기기 등이 오랜 기간 홈쇼핑 PD로 일을 하면서 체득한 대화법이다. 

말 한마디면 천냥 빚도 갚고 좋은 방송을 만들 수 있는데 이 정도 신경 쓰임이야 무슨 대수일까. 가끔 홈쇼핑 PD들이 호스트들만큼이나 말을 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아마 이런 꾸준한 자신만의 대화법이 빛을 발하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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