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작가다] 저는 홈쇼핑 PD입니다.

by 지크

"저는 홈쇼핑 PD입니다"

어디서건 내 직업에 대해 소개할 자리가 있으면 흔쾌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PD라는 직업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직업이지만 그 앞에 홈쇼핑이라는 단어가 하나 붙었다고 수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또한 홈쇼핑에 대해 사람들이 가진 은근한 반감과 편견은 이미 직업 소개로 지친 나에게 내가 속한 산업군에 대한 또 다른 해명을 하게 만든다.

대놓고 말은 안 하지만 쇼호스트의 그럴싸한 멘트로 시청자를 현혹해서 질 낮은 상품을 팔고 온갖 갑질로 얼룩진 그곳에 있는 너 역시 다를 바 없겠지 하는 눈빛은 내가 홈쇼핑 회사 소속임을 밝히기 더욱 어렵게 만든다.


꼭 이런 자리에서만 느끼는 것은 아니다. 심심찮게 터지는 홈쇼핑 뉴스를 볼 때마다 수없이 달리는 홈쇼핑에 대한 조롱과 불신의 댓글들로 대중이 홈쇼핑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이 글에서마저 시청자들을 속여가며 상품을 팔지는 않는다. 갑질 했다가는 내가 잘릴 판이다. 편견이다라고 해명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홈쇼핑 직원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몸을 움츠리게 되고 PD이지만 PD 같지 않다는 말 때문에 일하는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내가 홈쇼핑 PD라는 내 직업을 소중히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때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어느 날 난데없이 모바일 방송을 배정받았다. 홈쇼핑 방송이 TV 기반임에도 모바일 방송을 통해 상품을 판매한다는 것은 많은 경우에 그만큼 판매가 기대되지 않는다던가 브랜드가 고객들에게 어필하지 못한다는 낙인과 같은 것이었다. 어떤 상품일까 하고 회의에 들어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해외에서는 제법 이름이 있지만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그리고 매장이라고는 서울에 딱하나 있는 브랜드의 상품이었다. 회의에 참석한 브랜드 대표님은 모바일 방송이나마 홈쇼핑에 입점한 것에 대해 기쁨을 감추지 않았지만 애써 유지하는 밝은 톤으로도 매출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현재 상황 때문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감출 수는 없었다.


이때 홈쇼핑 PD는 선택을 해야 한다. 어차피 어려운 상품이니 가벼운 마음으로 방송을 하는 것에 의의를 둘 것인가. 아니면 최선을 다해 이 방송과 상품을 살려낼 것인가.

쉽지는 않아 보였지만 나는 두 번째 버튼을 눌렀다. 잠시 방송의 포맷에 대해 고민하다 대표님께 조심스럽게 매장에서 방송을 해도 괜찮을지 여쭤보았다. 대표님은 판매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 하겠다고 했고 그렇게 회의는 마무리되었다.


홈쇼핑 방송이지만 스튜디오가 아닌 실제 그 브랜드의 매장에서 하는 모바일 방송.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지만 눈길을 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다음날 쇼호스트와 함께 매장에 방문했다. 다행히 매장은 매우 깔끔하고 방송에도 문제가 없을 만큼 환경이 잘 갖춰져 있었다. 쇼호스트에게 상품을 직접 보여주고 가볍게 방송 동선 체크를 하던 중 내가 불쑥 말을 꺼냈다.


"이번 방송은 거창한 카메라랑 조명 같은 거 없이 그냥 핸드폰 하나로 해봅시다. 브이로그처럼 셀카로"


난데없는 내 말에 호스트는 펄쩍 뛰었고 어떻게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게다가 셀카로 방송을 진행하냐며 난감해했다. 요즘 매장에 방문하는 고객들도 없는데 게다가 대한민국에 딱 하나 있는 매장이니 홈쇼핑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유튜브처럼 고객들이 어렵게 매장에 방문할 필요 없이 우리가 대리 방문해서 소개한다는 컨셉으로 방송을 해보고 싶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쇼호스트는 그제야 방송 포맷을 받아들였고 대표님 역시 그렇게 해보자며 오랜만에 의욕을 보였다.

그리고 방송 당일, 매장에서는 오픈한 이래 가장 바쁘게 많은 사람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매장을 방송 무대로 만들려고 하니 소품 배치부터 방송 동선까지 확보하느라 오후 내내 북새통이었다. 그리고 시작된 방송. 깔끔한 무대와 정갈한 쇼호스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현장감 있는 셀카와 발랄한 쇼호스트의 멘트로 방송이 시작되었다. 홈쇼핑에서는 보지 못한 방송에 시청자들이 조금씩 늘어갔다. 매장 전체를 분주히 돌아다니며 상품을 설명하던 쇼호스트는 어느덧 상품 판매보다는 시청자들과 수다를 떨며 방송을 즐기고 있었다.

홈쇼핑 방송에 익숙한 사람들은 뭐 이런 근본도 없는 방송이 있냐며 혀를 찼겠지만 흔들리는 셀카 화면과 정교하지 않은 방송 진행에도 상품은 꾸준히 판매가 되었다. 그 흔한 자료화면 하나 없이 한 시간 내내 매장의 모습과 쇼호스트의 멘트로만 채워진 방송이 마침내 끝이 났다.

결과는 매장 1년 치 판매량에 맞먹는 매출. 정말 흔치 않게 방송이 끝나자마자 현장의 모두가 환호성을 질렀고 대표님은 믿기지가 않는 듯 몇 번이고 매출 화면을 다시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현장의 흥분이 가라앉자 한동안 말없이 구석에서 생각에 잠겨있던 대표님이 나에게 다가왔다. 뭔가 할 말이 많은지 입술을 여러 번 들썩였지만 내 손을 꼭 잡은 채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평소 같으면 상품이 좋아서 잘 나갔다, 쇼호스트가 잘해서 판매가 좋았다 등의 거창한 인사치레를 할 테지만 뭔가 울컥하는 마음에 그저 고개를 푹 숙여 나 역시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었다. 이 상품은 그 방송의 성공에 힘입어 결국 TV 방송으로까지 진출을 했다. 홈쇼핑의 주력 채널답게 더 큰 매출을 했음은 물론이다.


누구나 생각하는 PD 직업군과는 결이 다르다. 모두가 선망하고 칭송하는 회사도 아니다. 누군가는 지금도 홈쇼핑을 손가락질한다. 지금도 예능에서는 홈쇼핑 방송을 개그 소재로 활용한다. 하지만 이런 멋진 순간들이 있기에 홈쇼핑을 다니면서 나는 내 직업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되고 때로는 고단한 직장생활 속에서 큰 위로를 받기도 한다.

현재 나를 가장 나답게 표현하는 것은 바로 ‘홈쇼핑 PD’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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