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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Mar 10. 2022

쇼호스트의 멘트 하나하나가 다 싫었다

사람마다 궁합이 있듯이 PD도 잘 맞는 쇼호스트가 있고 안 맞는 쇼호스트가 있습니다. 마음이 잘 맞는 쇼호스트와는 한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를 정도로 방송이 재미있게 진행되는데  마음이 잘 맞지 않거나 개인적으로 별로라고 생각하는 쇼호스트와의 방송은 PD에게도 참 고역입니다.


꽤 오래전 평소에 같이 방송도 거의 안 해보고 방송 준비가 미흡하다는 소문을 들어 썩 마뜩잖게 생각하던 쇼호스트와의 방송이 예정되어있었습니다. 하필 회의시간에도 10분 정도 늦어서 기다리는 동안 없는 말주변으로 MD와 파트너사를 즐겁게(?) 해주느라 한참을 고생했습니다. 


그렇게 어렵거나 시청자들이 이해하지 못할 상품이 아니었던지라 회의는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상품 설명과 방송의 컨셉 그리고 약간의 의견들이 오가고 회의가 마무리될 때쯤 쇼호스트의 질문들이 쏟아졌다. 파트너사가 열심히 답변을 하는 모습을 보며 기분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괜히 늦게 와서 열심히 하는 척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쇼호스트와 단 둘이 방송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꽤 오랜 시간 방송의 뼈대를 잡고 이렇게 저렇게 해보자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서로의 아이디어를 합쳐 평소에 보지 못하던 오프닝 장면을 구성했습니다. 이것만 잘해도 좋은 방송이 될 거 같았습니다.


방송 당일 미리 한번 방송 흐름을 맞춰보는데 친분이 없다 보니 리허설 분위기가 밝지 않았습니다. 진행 콜과 쇼호스트의 멘트 그리고 스탭들의 짧은 대화만이 삭막하게 스튜디오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방송 시간이 다가왔고 우리가 야심차게 준비한 오프닝으로 방송을 시작하려던 참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놀랍게도 아니 황당하게도 쇼호스트는 우리가 약속한 오프닝 흐름을 하나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마치 브레이크 고장난 자동차처럼 혼자 급발진하는 쇼호스트를 보며 분노에 찬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허둥지둥 다시 방송 세팅을 하며 다시는 이 쇼호스트와 방송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만 가득했습니다. 쇼호스트의 멘트 하나하나가 다 싫었습니다. 신경질적으로 콜을 하고 사납게 컷을 넘겼습니다. 방송이 얼른 끝나서 한마디 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잠시 영상이 나가는 동안 참지 못하고 불쑥 뾰족한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아니 이럴 거면 왜 미리 방송을 맞춰봅니까. 오프닝을 그렇게 마음대로 하면.."


생각보다 빨리 끝난 영상 탓에 차마 하고 싶었던 말은 다 못 하고 쇼호스트의 멘트가 그 자리를 다시 채웠습니다.

씩씩대며 방송을 진행하는데 방송 흐름도 PD 기분을 따라가는지 그렇게 거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미처 확인하지 못한 심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방송 직전 심의팀에서 보낸 메시지인데 놓친 것이었습니다. 급히 확인하니 심의상 주의해야 할 것들과 하면 안 되는 것들에 대한 내용이었는데 우리가 준비한 오프닝 흐름과 매우 겹치는 것이었습니다. 문득 방송 시작 콜 직전 쇼호스트가 '엇 심의 문구가!' 했던 것이 불현듯 생각났습니다. 특별히 쇼호스트와 할 말이 없어 휴대폰만 쳐다보던 제가 메시지를 놓친 것이었습니다. 


쇼호스트는 그 찰나의 순간에 우리가 계획한 오프닝을 해버리면 심의상 큰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캐치하고 자연스럽게 문제없는 방식으로 방송을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쇼호스트는 최선의 그리고 최고의 대응을 한 것이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방송 직전에야 심의 주의 문구를 보내준 심의팀 아니 PD로서 출연진과 소통을 거부하고 방송 전반적인 것을 방송 직전까지 챙기지 못한 저에게 있었습니다. 방송 준비가 미흡하다는 소문 하나만으로 출연진을 판단하고 어떻게 방송하나 감시(?)하려고 했지만 정작 방송 준비에 소홀했던 건 저였던 것이었습니다.


문득 쇼호스트 대기석에 놓여있는 상품 기술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본래의 내용이 뭔지도 모를 정도로 빼곡히 글씨가 쓰여있는, 쇼호스트의 고민과 공부의 흔적을 보자 비로소 선입견에 갇혀있던 저는 똑바로 쇼호스트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쇼호스트의 멘트 하나하나가 귀에 꽂혔습니다. 예상이나 한 듯 쇼호스트가 회의 때 파트너사에게 물어본 날카로운 질문들이 시청자의 입을 통해 다시 나왔습니다. 미리 준비한 만큼 완벽한 답변들이 이어졌습니다. 방송 전반 30분이 저에게 소음이었다면 후반 30분은 마치 아름다운 선율과 같았습니다. 


방송이 끝났고 사실 매출이 썩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파트너사는 오늘 방송을 모범 사례로 삼고 싶다며 방송 영상을 좀 받을 수 없냐는 간청을 했습니다. 파트너사가 매출에 대한 아쉬움을 잊을 만큼 방송 퀄리티가 좋았던 흔치 않은 케이스였습니다.


뒷정리를 하며 쇼호스트에게 허심탄회하게 저의 잘못에 대해 털어놓았습니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소문만으로 미리 판단하고 작은 행동 하나하나 거기에 끼워 맞추며 마치 심판자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그리고 그런 쓸데없는 역할에 심취해 정작 PD로서 본연의 업무에 소홀히 한 점에 대해 사과했습니다. 


본래 성격이 싹싹하지는 않지만 그 뒤로 제 방송의 쇼호스트만큼은 먼저 다가가고 친분을 쌓으려고 노력합니다. 방송 최전방에 선 운명 공동체라 생각하며 허물없이 대하고 제가 원하는 것 그리고 출연진으로서 원하는 것을 가감 없이 말하고 받아들였습니다. 방송 전 끊임없는 대화로 긴장을 풀고 그 속에서 방송 진행의 실마리를 찾곤 했습니다. 스튜디오가 편해진 쇼호스트들은 마음껏 역량을 뽐내었고 방송 중에도 가까워진 출연진과 PD의 케미로 시청자들을 즐겁게 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지금은 어느 쇼호스트와도 죽이 척척 맞는 PD가 되었습니다. 그 누구와도 즐겁게 방송할 생각에 기다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방송은 참 이상하게 출연진과 제작진의 분위기가 그대로 시청자들에게 전해집니다. 점점 우리의 방송에 대한 만족도가 올라간 것은 또 하나의 보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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