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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크 Apr 08. 2022

모든 층에 멈추던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얼마 전 외출을 하면서 버스 정류장까지 거리와 버스 도착 예정 시간을 나름 정밀히 계산해서 딱 맞게 집을 나섰습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평소 같으면 한 번이나 많아도 두 번 정도 멈추던 엘리베이터가 올라오면서 5번을 멈추더니 내가 있는 층을 지나쳐 또 4번 정도 멈추고 내려오기 시작했습니다. 1분이면 탈 줄 알았던 엘리베이터를 5분 가까이 기다리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가뜩이나 배차 간격이 긴 버스를 생각하며 체감상 엘리베이터가 모든 층에 멈추는 느낌이었습니다.  급기야 대체 어떤 인간들이 이렇게 엘리베이터를 점령(?)하고 있는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버스는 떠나기 직전이었고 100% 약속에 늦을 것이 뻔했습니다. 아무 잘못 없지만 엘리베이터에 누가 타고 있으면 한껏 노려보고 싶었습니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문이 열렸습니다. 한껏 힘 준 저의 눈이 빠르게 희생양을 찾았고 마침내 수레에 박스를 가득 실은 택배 기사님을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문득 10여 년 전 택배기사 체험을 할 때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홈쇼핑 회사에 입사하고 의무적으로 해야 했던 일일 택배기사 체험. 하루 동안 택배기사님과 동행하면서 직접 배달도 해보고 택배기사님들과 이야기도 나누면서 커머스의 최종 단계인 배송을 체험해보는 교육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했던 기사님은 조용하고 차분한 타입이었습니다. 빠른 일처리가 안 되는 제가 걸림돌이라고 생각을 했는지 혹은 하루 체험 온 직원에게 일을 시키는 게 불편했는지 기사님은 저에게 배달을 거의 시키지 않고 계속 차에서 기다려달라는 말만 하고 혼자 배달을 다녔습니다. 

늦은 오후쯤의 일이었습니다. 드물게 저에게 같이 도와달라는 기사님의 요청에 수레에 한가득 택배를 싣고 대단지 아파트에 들어섰습니다. 한 동에 배달 상품이 몰려있어서 빠르게 두고 나오자는 게 기사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가 흔치 않은데 작업시간이 많이 줄 것 같다며 오늘 와줘서 기운이 좋다는, 기사님의 처음 듣는 농담을 들으며 얼른 도와드리고 기분 좋게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해당 층들을 누르고 배달이 시작되었습니다. 문이 열리면 기사님과 제가 번갈아가며 현관 앞에 상품을 두고 빠르게 다시 타는 것이 반복되었습니다. 그렇게 20여 층을 올라가며 6건 정도를 배달한 기억이 납니다. 배달을 마치고 내려오는데 어느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습니다. 이 때는 왜 기사님이 갑자기 긴장하는 표정을 지으셨는지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입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타자마자 분통을 터뜨렸습니다.


"엘리베이터 전세 냈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알아요?? 좀 나눠서 하던가 짜증 나게"


거침없이 쏘아대는 입주민에게 택배기사님은 작은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을 건네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적막이 흘렀고 왠지는 모르겠지만 1층에 가까워질수록 저 역시 분노 게이지가 올라가고 있었다.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입주민의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저기요. 이 분이 뭐 장난친다고 엘리베이터 잡았나요? 다 여기 계신 분들 주문한 거 배달하시려고 그러는 거죠. 정 급하면 계단으로 가면 되잖아요. 본인은 언제든 바로 탈 수 있게 엘리베이터 전세 냈습니까?"


급발진하는 저의 말에 입주민의 얼굴이 붉어졌고 기사님의 만류로 더 큰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차로 돌아온 뒤 괜히 씩씩대는 저를 보며 기사님은 종종 그런 눈치 주는 분들 있다고 일일이 신경 쓰면 일 못한다며 그만 들어가라며 저를 돌려보냈습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그 잠깐의 대화를 하면서도 기사님은 시간이 흐르는 것을 초조해하셨습니다. 지하철역에 저를 내려주고 쏜살같이 사라지는 기사님의 배송차량을 보며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후 회사에 제출하는 교육 보고서에 이런 부당한 행위가 벌어지고 있어서 택배기사님들에게 악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을 넣었는데 교육 나가서 다른 사람과 마찰이 있었다며 혼이 났던 기억도 납니다. 


1층에 도착하고 열림 버튼을 누르고 기다리자 택배기사님이 가볍게 목례를 하고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담당하고 있는 지역 기반으로 일을 하시니 아마 우리 집 상품도 종종 배달하시는 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택배기사님들이 간단히 목이라도 축일 수 있는 음료수를 현관 앞에 구비해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모든 층에 멈추던 엘리베이터 덕에 버스는 놓쳤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놓칠뻔했던 지난 기억 하나가 되살아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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