홈쇼핑업계가 냉정한 이유는 주요 업무라고 할 수 있는 방송의 성공 혹은 실패 여부를 방송 직후에 바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홈쇼핑PD로서 목표 매출을 달성했냐 안했냐에 따라서 방송 후 MD 및 협력사 그리고 쇼호스트와 진행하는 리뷰회의 분위기가 달라지기 때문에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목표매출을 달성하면 리뷰회의가 그렇게 훈훈할 수가 없습니다. 서로 수고했다며 공을 돌리고 또 잘해보자며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반면 목표매출을 달성 못한 방송의 리뷰회의는 심각함의 연속입니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 말없이 서로 고개만 숙이고 있을 때도 있고 정말 가끔은 서로의 탓을 하며 고성이 오가기도 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당부했지만 시중 가격 통제가 안된 상품을 방송하며 고객들에게 이런 가격으로 홈쇼핑 방송을 하냐는 항의를 한시간 내내 듣고 매출까지 망친 상황에서 협력사에게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고 쇼호스트가 저에게 방송 진행이 별로였다며 쓴소리를 한적도 습니있다. 이렇듯 실패의 현장에서는 모두 그 원인을 제공한 책임자를 찾기 마련입니다. 본인 빼고.
어느 날이었습니다. 상품 잘 골라오기로 유명한 MD와 방송 경력만 10년이 넘은 베테랑 쇼호스트와 짝을 지어 방송을 하는데 방송 시간 절반이 넘도록 목표 매출 달성률이 7%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필 그날따라 방송 진행도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대체 이 방송이 끝나면 MD며 협력사며 쇼호스트에게 뭐라고 말을 할것인가. 나는 또 얼마나 무능한 PD로 찍힐 것인가. 지금이라도 큐시트를 집어던지고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10분여를 더 방송했지만 목표 매출의 10%에도 이르지 못했고 결국 홈쇼핑 방송 최악의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 편성팀으로부터의 방송 중단 요청까지 더해져 사태는 정말 최악으로 치달았습니다. 회의실로 가는 그 길이 영원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숙한 PD로 얼마나 또 비난을 받을지 무서웠습니다. 회의실에 들어가니 협력사 직원분들이 무서운 표정으로 책상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고생하셨다는 말을 전했지만 답은 없었습니다. 괜히 상품도 별로였던 것 같고 쇼호스트의 공부도 부족했던 것 아닌가 하는 반발심이 들었습니다. 비난의 화살이 저에게 쏟아진다면 저 역시 비난의 대상을 찾고 싶었습니다.
잠시 후 MD가 들어왔습니다. 잔뜩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는데 MD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멘트가 튀어나왔습니다.
“아 역시 조금 더 시즌을 기다릴 걸 그랬네요. 제가 좀 섣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PD님 특히 고생하셨어요”
협력사 직원분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MD의 너스레가 계속되는 가운데 쇼호스트가 헐레벌떡 회의실로 뛰어들어왔습니다.
“방송도 망치고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제가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멘트도 그렇고 너무 엉망이었네요. 이거 원 면목이 없습니다”
MD와 쇼호스트가 서로 본인 탓을 하자 방송의 실패를 의심없이 PD의 미숙함 때문이라고 생각한 협력사 직원분들이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는 MD와 다음에 더 잘 준비해서 출연료 안 받더라도 다시 출연하고 싶다는 쇼호스트의 멘트가 끊이지 않으며 방송리뷰회의는 그렇게 끝이 났습니다.
MD가 고생했다는 말과 함께 협력사 직원분들과 사라졌고 쇼호스트 역시 다시 한번 미안하다는 말을 하며 다음에 더 잘해보자는 말과 함께 떠났습니다.
문득 그 와중에 실패의 책임을 돌릴 부분은 없을까 고민하던 제가 부끄러웠습니다. 모두가 본인 잘못이라고 하는데 저 역시 책임이 있다는 말 한 마디를 못 꺼낸 제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후로 잘된 공은 남들에게 돌리고 실패의 책임은 제일 먼저 지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럴수록 신기하게도 결국 성공의 과실은 건너건너 저에게까지 돌아왔고 제가 지려고 했던 실패의 책임은 서로 나서서 나눠가지려고 했습니다. 또한 진심으로 실패가 저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자 그것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욕이 절로 생겨났습니다.
10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본인이 잘못했다며 협력사와 한참 어린 PD 앞에서 고개 숙이던 MD와 쇼호스트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 날은 분명 제 커리어 전환점이자 인생의 전환점이 된 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