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나지 않겠지만 감사했습니다

by 지크

홈쇼핑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정말 많은 제조사와 브랜드사 관계자분들을 만나게 됩니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대기업 직원분들부터 가족끼리 운영하는 작은 회사의 직원분까지 조금 과장하면 대한민국에 있는 모든 회사의 관계자분들을 만나게 되는데 그러다 보니 정말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 좋게 웃으며 모든 제안을 거절하는 분, 회의 때 말 한마디 없이 듣고 돌아가서 정말 방송하실 마음이 있는지 궁금한 분, 애걸하다시피 잘 좀 부탁한다며 의지를 보이는 분 등 가끔 홈쇼핑 PD가 물건 파는 방송을 기획하는 직업인지, 사람을 응대하는 직업인지 헷갈릴 때도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협력사 관계자분들은 협조적이고 본인의 상품이 잘 팔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어느 날 새로운 상품 방송이 편성되어 회의를 들어갔습니다. 처음 보는 협력사 직원분이 유달리 반갑게 저를 맞으며 인사를 했습니다. 활달하신 분인가 보다 하며 회의를 진행하는데 그 직원분이 저에게서 시선도 떼지 않고 제 말 한마디 한마디에 호응을 하며 저와 쇼호스트 그리고 MD가 제안하는 내용들을 단 하나도 거절하지 않고 모두 수용하겠다는 스탠스를 취했습니다. 회의가 원만하게 진행되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단독 혜택 등 다소 무리한 요구도 1초의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해보자는 직원분의 반응에 오히려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후에 가서 대표님이나 회장님이 승인을 하지 않았다고 죄송하다고 하는 바람에 기껏 준비하던 방송 컨셉을 다 엎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쨌든 단 하나의 이견 없이 매우 좋은 분위기로 회의가 마무리되었고 쇼호스트와 회의실을 나서려는데 그 협력사 직원분이 저에게 잠시만 시간을 줄 수 있냐는 말을 했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 아까 협의했던 내용들 중 일부는 좀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많아 그러면 그렇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만면에 웃음을 띤 직원분은 한참을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이상하다 느낄 만큼의 침묵이 지난 후 직원분이 입을 열었습니다.


"PD님 혹시 저 기억 안 나세요?"


갑작스러운 말에 당황하기도 하고 정말 초면인 분이라 어버버 하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7,8년 전쯤에 재직하고 있던 회사가 많이 어려웠어요. 월급이 나오네 마네 전부 잘리네 마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사회경험이 적었던 터라 회사가 망하면 대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을 많이 했죠. 그때 제 사수분과 홈쇼핑 방송 회의를 왔을 때 PD님을 처음 만났어요. 사실 그때 MD분이 저희 상품을 냉정하게 평가하기도 하셨고 저희도 저희 상품에 자신이 많이 없어서 잔뜩 위축되었던 시기였어요. 그런데 PD님이 회의 때 싫은 소리 하나 안 하시고 잘되는 방향으로만 생각하자며 여러 아이디어도 주시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회의 끝난 후에도 저희 회사로 연락하셔서 상품에 대해 계속 물어보기도 하시고 결정적으로 방송에 꼭 필요한 물품이 있었는데 회사 사정이 어려워서 구매가 어려워지니까 PD님이 사비로라도 사서 하겠다고 하셔서 놀랐어요"


여기까지 듣고 나자 어떤 상품이고 방송이었는지 생각이 났습니다. 개인적인 비용을 들여서 해본 유일한 방송이었고 멋없게 협력사 직원분들께도 열심히 생색을 냈던 터라 기억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다행히 그 방송을 포함해서 4번 연속 좋은 매출을 달성해서 그 포트폴리오로 다른 유통채널도 뚫을 수 있었어요. 상품이 한번 제대로 팔리기 시작하니까 그게 또 판매 히스토리가 되고 고객들이 찾게 되는 선순환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회사도 안 망하고 저도 잘 다니다가 이직을 할 수 있었어요. 당시에는 보조 역할이었던 터라 PD님과 직접적인 대화 같은 걸 할 기회가 없었는데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PD님 방송을 믿고 이번 방송에 무엇이든 다 지원하겠습니다"


손사래를 치며 상품이 좋아서 판매가 잘 된걸 왜 내 덕분이라 하냐며 PD 혼자 해낼 수 있는 건 없다고 말하면서도 기분은 좋았습니다. 직원분과는 이번 방송도 파이팅해보자며 기분 좋은 만남을 끝냈습니다.


계속해서 밝히는 바이지만 사회적 인식이 그리 좋지 않은 홈쇼핑 종사자로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건 이런 경우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대부분의 홈쇼핑 직원들이 좋은 상품을 발굴하여 많은 매출을 올리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방송은 열심히 준비했음에도 매우 아쉬운 매출을 기록하며 서로 민망한 상황이 연출되었습니다 :)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실패의 책임을 어디서 찾을까. 나는 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