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야! 계약서 하나만 쓰자!

by 지크
친구야! 오랜만이다! 잘 지내냐!!
나 기억하지?!


제가 한 커머스 플랫폼의 미디어커머스 총괄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

낯선 이로부터 메시지 하나가 왔습니다.

자세히 보니 학창 시절 나름 교류가 있었던, 지금은 연이 끊긴 지 20년 가까이 된 친구였습니다.

오랜만이라고, 잘 지내냐고 답을 하자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친구야! 어쩜 그리 연락이 없었냐. 보고 싶었다. 커머스 플랫폼에 있다며? 멋있네!"


난데없는 인사였지만 그래도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기, 내가 작은 사업을 하거든, 상품이 되게 괜찮아! 근데 잘 안 팔려서 고민이 많다. 친구야 혹시 나 좀 도와줄 수 있냐"


한마디로 본인 상품이 있는데 우리 플랫폼에 입점을 시켜서 방송으로 팔아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조금은 난감한 부탁이었지만 일단 상품에 대한 정보를 좀 있는 대로 다 보내달라고 말했습니다. 친구는 몇 번이나 고맙다며 전화를 끊기가 무섭게 온갖 자료와 고객들의 리뷰, 상품 관련 영상 링크를 줄줄이 보내더니 한마디 덧붙였습니다.


"친구야! 그래도 써봐야 좋은 상품인지 알지 않을까? 집주소 남겨놓으면 좀 넉넉하게 보낼게! 잘 좀 부탁해! 계약서 쓰게 되면 내가 잊지 않을게!"


괜찮다고 말하며 샘플 구매 프로세스가 있으니 상품 선정 회의 때 필요하면 우리가 구매해서 살 테니 걱정 말라고 답을 했습니다.

업무 틈틈이 친구가 보내온 정보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나쁘지도, 그렇다고 크게 좋지도 않은 그런 상품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당 카테고리 PD와 MD 몇 명에게 상품 정보를 추려서 보내며 상품이 어떤지 의견을 구했습니다.


하루가 지나지 않아 친구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습니다. 혹시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는 말에 제가 직접 상품 검토를 했고 해당 카테고리 실무진이 상품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라고 답했습니다. 잠시 말이 없던 친구가 저녁에 잠시 시간 괜찮으면 회사 앞으로 오겠다며 오랜만에 술이나 한잔 하자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퇴근시간이 되자마자 친구는 회사 앞으로 찾아왔습니다. 으리으리한 외제차와 함께.

본인이 예약을 해두었다며 강남으로 향하는 차를 몇 번의 설득 끝에 학창 시절 추억이 담겨있는 동네로 돌렸습니다.

두부김치에 막걸리를 한잔하며 지난 세월을 공유하고 때로는 진지한 이야기로 밤을 채웠습니다.

몇 병의 막걸리가 비워진 뒤에 친구는 현재 자신의 어려움과 꼭 이번 기회가 필요함을 말하며 도와달라는 이야기를 반복했습니다.

은근한 보상의 이야기 또한 빼놓지 않았습니다.


MD들을 따로 불러 상품이 어떠한지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했습니다. 머뭇거리던 MD 한 명이 이 상품을 어떻게 알고 전달한 것인지 물어왔습니다. 지인이 소개를 해줘서 알게 된 상품이라고 하니 MD들의 눈빛이 눈에 띄게 난처해졌습니다. 아무도 말을 않기에 제가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저희의 제한된 편성 안에 이 상품이 들어가면 다른 상품 하나는 방송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제 지인의 상품이기는 하나 꼭 편성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사사로운 감정은 모두 빼고 냉정하게 상품성 하나로만 평가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러자 MD 한 명이 지속적인 배송 이슈가 발생하고 있는 상품이라며 고객들의 만족도가 매우 낮은데 배송 상의 잘못이 아니라 상품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또 다른 MD는 현재 소비자 니즈가 거의 없는 상품이라며 홈 화면 배너 플레이 등을 통해 조금 매출을 발생시킬 수는 있겠으나 방송까지 하기에는 리스크가 크다는 의견을 냈습니다.


그날 밤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객관적으로 검토한 결과 입점 및 방송을 하기에는 어려운 상품으로 판단이 된다는 말과 함께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보탰습니다.

왠지 마음이 불편하여 지금 상품의 보완점과 더불어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입점 가능해 보이는 몇 개의 플랫폼의 안내까지 덧붙여 장문의 메시지를 하나 더 보냈습니다.

메시지를 읽고도 한동안 말이 없던 친구는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언제 소주나 한 잔 하자며 진한 아쉬움을 애써 감추었습니다.


유독 저를 친구라고 강조해서 부르던 그에게 저는 여전히 친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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