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님이라는 달콤한 멘트에 취해있었다

by 지크

신입 티를 막 벗고 어엿한 한 명의 pd로 일하고 있다고 느낄 때 즈음의 일입니다.

협력사 입장에서는 홈쇼핑 방송이라는 것이 다른 판로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중요하기도 하고 하루 20시간이라는 한정된 방송 중 하나를 따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만족스러운 매출을 만들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일개 홈쇼핑 PD와 쇼호스트와의 방송 회의에 회사의 대표를 비롯한 고위 임원진이 참석하기도 하고 분위기가 잘 부탁드린다는 쪽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방송 회의 때마다 00 회사 대표, ㅁㅁ회사 이사 등등이 저를 꼬박꼬박 PD님이라 불러주며 잘 좀 부탁한다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저 역시 자연스레 목에 힘이 들어가고 왠지 제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무더운 여름, 한 교육회사의 전무이자 대표의 동생인 분과 방송 회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약속 시간보다 5분 정도 늦게 회의실로 헐레벌떡 들어온 전무님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죄송하지만 땀을 좀 닦겠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천천히 하시라 말씀드리니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이마의 땀을 황급히 손수건으로 훔치며 방송 샘플을 보여주겠다며 박스도 아닌 큰 보자기를 테이블 위에 올렸습니다.

구멍 투성이의 보자기를 풀자 아동용 장난감이 우르르 쏟아졌고 테이블 밑으로 떨어진 것들을 같이 주워가며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아직 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상기된 표정으로 상품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고 어렵게 편성된 방송이라 잘 좀 부탁드린다며 저에게 몇 번이나 말하는 전무님을 보며 마음 한구석에서 동정심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본인보다 한참 어린 사람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부탁을 하다니.. 협력사 관계자분들 정말 안된 것 같다..'


왠지 죄송한 마음과 더불어 이런 분들께 부탁을 받는 제가 세상 최고의 사람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회의가 끝나고 마침 선배 한 명이 바람이나 좀 쐬자고 하여 회사 주변을 잠시 걸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PD님! 하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습니다.

자동차에 대해 무지한 제가 알정도로 유명한 외국 브랜드의 한정판 자동차 뒷좌석에 방금까지 나와 열심히 회의를 하던 전무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면서 방송날 뵙겠다는 말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너무 놀라 걸음을 멈추자 선배는 잘 아는 회사인 듯 매우 탄탄한 회사고 임원들은 어느 정도의 연봉을 받는지에 대해 소상히 알려줬습니다. 특히 전무님은 대표의 가족인데다 해외 사업 확장에도 큰 역할을 하고 있어 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연봉을 받으며 강남 아파트 꼭대기층에 사는 분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땀범벅이 된 옷차림에 보자기를 낑낑대며 가져와 몇 번이고 허리를 굽히며 잘 부탁한다던 전무님이 저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은 그날은 저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후 협력사 관계자분들이 아무리 저자세로 나오든 동정심을 느낀다던가 제가 이 분들보다 대단한 것 같다는 생각을 싹 없앴습니다. 그런 그 분들의 태도가 홈쇼핑이라는 작은 우물 안에서나 통용되는 비즈니스의 한 방법일 뿐이며 여기를 벗어나면 많은 협력사들이 더 큰 비즈니스를 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회사의 대표이자 임원인 그분들에게 수백 번 PD님 소리를 들어도 결국 저는 회사에서 쥐꼬리만 한 월급 받는 일개 직원인 현실을 잊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 업계에 있으면 있을수록 가장 필요한 것은 겸손 또 겸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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