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른 감정은, 말없이도 자랄 수 있어요.”
그건 어쩌면,
한 번도 꺼내지 못한 말이었고,
누군가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었죠.
그래서 그녀는
말 대신 모래 위에 손가락을 조심스레 눌렀어요.
지워도 흔적이 남지 않는 공간이,
지금은 가장 안전하다고 느껴졌죠.
그 순간—
묻잎삼이 작은 모래 스케치북을 들고
그녀 곁에 조용히 다가왔어요.
입가에는 말 대신, 작은 미소 하나.
묻잎일도 함께 다가와
모래를 살살 털어내며 속삭였죠.
“여긴, 괜찮아요.
말을 올리지 않아도, 감정은 알아볼 수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
모래 위에 작은 점 하나를 찍었어요.
아직 말이 되지 않은 마음이었지만,
그건 그녀 안의 감정이
처음으로 ‘모양’을 가진 순간이었죠.
그 작은 점 하나.
문장도 아니고, 설명도 없었지만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기분이었어요.
조용히, 고요하게.
하지만—
스르륵. 그녀의 손끝이 멈췄어요.
모래 위, 다른 사람의 흔적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거든요.
어딘가 낯설고 날카로운 말.
누군가의 감정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을 너무 빠르게 파고들었어요.
숨이 가빠졌고,
그녀는 뒤로 물러서려 했어요.
그때—
모래 한가운데에서
작은 그물망 하나가 살랑 흔들렸어요.
묻잎일과 묻잎이가 마주 보며
그물을 부드럽게 펼쳤어요.
거친 말들은 그 사이를 지나며
조용히 걸러졌죠.
묻잎이가 다가와 말했어요.
“모든 감정을 다 받아낼 필요는 없어요.
흐르지 않는 건, 걸러도 괜찮아요.”
그녀는 그 그물의 움직임을 바라보다
조금씩 숨을 돌렸어요.
“이건… 내 감정이 아니었구나.”
그 말과 함께,
모래 입자들이 조용히 가라앉았어요.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것들과,
굳이 닿지 않아도 되는 감정들이
조금씩 멀어졌죠.
그날 그녀는,
무언가를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어요.
아까 남긴 글도,
누군가의 말에 남긴 짧은 반응도.
심지어, 오늘 하루의 자신조차도요.
말없이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을 때—
묵직한 파동이 그녀 안에서 퍼졌어요.
그때였어요.
창틀 아래에 내려앉은 묻잎삼이
작은 조개껍데기 하나를 꺼냈어요.
묻잎일이 그 안을 들여다보았고,
얇게 겹쳐진 감정의 층이
그 속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었어요.
묻잎삼은 조개껍데기를 바닥에 조심스레 눕혔고—
쓱. 아주 작게,
잔잔한 파도가 껍데기 안에서 퍼져나갔죠.
“이건 지우는 게 아니에요.
흘려보내는 거예요.”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어요.
자책, 후회, 망설임이
그 파도 속에서 하나씩 밀려나갔어요.
그건 단순한 삭제가 아니라,
스스로 허락한 회복의 흐름이었어요.
묻잎삼은 껍데기를 조심스레 닫고
그녀의 핸드폰 옆에 놓아두었어요.
그 순간—
방 안은 다시 조용했지만
그녀의 마음은 달라져 있었어요.
그날 밤,
그녀는 창문을 열었어요.
밤공기가 차가웠지만
그 안엔 왠지 모를 안도감이 섞여 있었어요.
며칠 전의 감정은 이제 잘 기억나지 않았고,
금세 흘러가버렸지만—
무언가,
조용히 남아 있는 듯한 기분이었어요.
그때 책상 귀퉁이에서
작게 일어난 존재—
묻잎사였어요.
묻잎사는 조그마한 씨앗 하나를 꺼내
그녀의 머리맡에 조용히 두고 갔어요.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건,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흔적이에요.”
그녀는 들을 수 없었지만
마음 깊은 곳이,
살짝 반응했죠.
그 씨앗은 빛나지 않았지만
그 안에서 감정은
아주 조용히 숨 쉬고 있었어요.
그날도 평범한 하루였지만
어쩐지 마음 한 귀퉁이가
조금 덜 무거웠어요.
그녀는 조그마한 씨앗을 손안에 올려두었어요.
부서질 듯 말 듯,
작게 떨리고 있었죠.
그리고 그때—
빛바랜 커튼 틈으로
부드러운 바람이 스며들었어요.
그녀는 어느새,
익숙하지 않은 풍경 안에 서 있었어요.
풀잎이 숨을 쉬고,
하늘이 낮게 깔린 곳.
정원이었어요.
말도, 피드도, 숫자도 없었지만—
마음이 먼저 알아차렸어요.
“여기는… 괜찮은 곳이야.”
묻잎사와 묻잎이는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다
작은 벤치 하나를 가리켰어요.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앉았고,
잠시, 숨을 깊이 들이쉬었어요.
감정은 그곳에서
말없이 자라고 있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