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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밥 Feb 09. 2024

오늘은 그런 날이다

가끔 하는 생각

면도기에 베인 상처가 거의 아물었다.


화장실로 가 오줌을 누면서 면도기를 바라봤다.

잠깐 고민하다 면도는 하지 않기로 하고 외출 준비를 했다.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었지만 별로 신경 쓰진 않는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몸은 무겁고 마음은 가벼운 것 같다.

평소엔 몸도 마음도 무겁더니 마음이라도 가벼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무거운 몸을 이끌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날아갈 듯 가벼운 채로 하루 종일 누워있지 않은 게 어디인가.


운동화를 신을까 하다가 슬리퍼를 신고 나서본다.

멀리 갈 생각은 없나 보다.

잔돌에 슬리퍼가 벗겨지지 않게 조심해서 걸어간다.

어제 본 집 앞 나무를 또 한 번 쳐다봤다.

다른 느낌쯤으로 여기고 그냥 지나간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의식해 보지만 의식하지 않은 것처럼 시선을 고정하며 걷는다.

무념무상의 멍 때림으로 걸어가 보기도, 소소한 동네 풍경에 감성을 싣기도 해 본다.


오늘은 그런 날이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것 같아 잠들어가는 의식을 부여잡고 나와 걸어야 하는 날.

의무감은 아니고 육신을 위한 의무쯤의 날.

무릎과 발바닥에 중력을 느껴가며 생명체로써 기억을 주입한 날.

뭐 그냥 남들 신경에 걸치지도 않은 날.

요즘 같아선 그냥 기분 좀 내본 날이다.


그렇게 한 시간쯤 걷다가 더 가벼워진 마음으로 돌아와 더 무거워진 몸을 눕힌다.

태초에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생각이라는 걸 넣어뒀지만 종종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거추장스러울 때도 부담스러울 때도 또 따분할 때도 있는 거니까.


오늘은 그냥 그런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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