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위할 삶의 영광을 위해 다듬어지지 않은 나를 다듬을 시기며, 먹고 살아갈 숟가락을 들기 위해 구첩반상의 결과물을 차려야 할 시기다. 난 검증되지 않은 나를 키우는 대신 검증하지 못할 나를 씌워가며 진정한 나를 지워가고 있었다. 구차한 '척'들만 밥상에 가득 쌓아 논 채로.
거짓이 쌓이면 진실보다 진실 같은 거짓이 창조된다. 그 믿음은 순간의 자기만족으로 모두가 믿을 거라는 허영을 투영시켜 허상의 자기상을 구축해 버린다. 신나게 시작해서 신물 나게 끝나버리는.
구차한 변명 같지만 결핍에서 시작된 '척 놀이'는 이유 있는 게으름을 시작으로 어느덧 습관을 거쳐 재미로 가고 있었다. 난 대학생활 내내 공부하는 척은 물론 공부 잘하는 척, 인기 있는 척 등 쉬지 않고 잘난 척 재수를 지워갔다. 하여 눈치 없는 나의 완성상은 알아서 떨어져 나가는 물과 기름같이 주변인의 이탈을 둥둥 띄우기에 충분했다.
운동 재능은 없었다. 짧은 단신에 발발거리는 뜀박질이 그나마 학창 시절 먹혔으나 미쳐 다 자라지 않은 것 같은 성인이 되었을 때 그마저도 자랑할 재능은 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있어 보이는 척, 말 잘하는 척하며 잘난 척 넌지시 운동신경을 내비쳤다. 학과 체육대회가 있을 때면 은근슬쩍 관심을 유발하다가도 들통나지 않으려 적당히 아픈 척 빠져나왔던 것 같다. 치밀하고도 부끄러운 거짓 같은 사실이다. 나도 모르게 끼어버린 농구경기에서 실력이 까발려지기 전까지 운동 잘하는 척은 인기 있는 척하는 내가 쥐고 다닌 잘난 척하는 카드였다.
'척'도 하다 보면 간헐적 치고 빠짐이 자연스러워진다. 하지만 들켰을 때의 끔찍함은 수치보단 도망에 가깝기에 매사 주의와 집중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완벽한 무지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무식이 드러난다. 무식해서 용감한 게 낫지 용감하게 무식한 건 별로다.
난 삐삐세대다. 지금이야 인공지능이 탑재된 최신 휴대폰들이 즐비하지만, 그때는 인공지능 버금가는 숫자 암호를 날리던 시대였다. 삐삐라는 무선호출기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많겠지만, 휴대폰이 대중화되기 전 서로를 좀 더 빠르고 가깝게 연결해 주는 일종의 매개체였다고 보면 된다. 486(사랑해) 같은 감정을 전하기도, 8282(빨리빨리) 같은 다급함을 남기기도, 7171717771(X새끼)처럼 강한 우정을 돌려 까기도 했으니.
상대방 삐삐 번호를 누르고 1번은 번호 호출, 2번은 음성 호출과 같은 방식이었으며 난 번호 호출을 주로 이용했다. 음성 호출은 혼자 늘어놓듯 녹음하는 방식이라 어색해서 잘 사용하지 않았다. 아니, 한 번의 실수 뒤엔 영영 안 쓰게 됐다.
그간 연락이 뜸했던 친구가 급성 맹장으로 입원했다는 걸 알게 됐다. 주제에 얽매이지 않고 진솔한 대화를 나눴던 몇 안 되는 친구였기에 의리 있는 척, 다정한 척 연락을 취했다. 이왕이면 음성을 남기고 싶었고 고민 끝에 30초 분량의 대사를 읊조리다 맘에 안 들어 끊기를 세 번쯤. 무탈하게 메시지를 남긴 후 일주일쯤 지나 그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왜 똑같은 말을 세 번 남겼느냐고.
생각도 더듬거리지 못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이 대화 너머로 보일 것 같았다. 녹음 후 취소 버튼을 누르지 않고 끊어버렸지만 온전히 잘도 전달된 거다. 당연히 녹음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던 게 그대로 남아있었던. 용감한 무지. 생각해 보라. 30초 분량의 주절거림이 그 대화하듯 읊조리는 주절거림이 대본을 읽듯 세 번이나 반복이 된다. 별거 아니라 생각할 수 있지만 난 그날 죽고 싶었다. 그리고 모르는 척 얼버무렸다. 취해서 기억이 안 난다고. 종종 취하면 그런다 하더라고. 그냥 모르는 척, 기억 안나는 척, 취한 척 해버렸다. 말짱한 정신으로 혼미한 척하면서
다시 만났을 때 내 간절함은 부처님 하느님 제발 등등이다. 모르는 척해주길 바라지만 "저번에 혹시"라는 서두와 함께 와장창 무너져버린다. 이미 표정은 "왜 그런 재미없는 변명을 했어"라고 말하고 있다. '깔끔하게 모른다'는 당당한 이해를 구할 수 있지만 '감춰진 게 들켰다'는 부끄럼, 수치, 민망함, 창피함 등 갖은 걸 토하고 치워야 한다. 애써 부여잡은 얼굴은 홍조를 넘어선 화끈함이 된다. 그나마 준비해 온 변명거리를 나열해 보지만 '척'하는 무리들은 어설픈 뭔가가 있어 일관된 피력에도 시원히 먹히질 않는다. 그것은 '양심'이고 꼴에 '부끄럼'을 느낀다. 해서 '척'하는 인생에 그나마 변화의 당위성을 부여해 준다. 그 양심마저 쪼개어 사라지는 순간 '반성하는 척'이라는 구제불능의 나락으로 빨려간다.
이젠 각자의 삶 속에서 소식조차 알기가 쉽지 않지만 솔직하지 못했던 잔상은 여전히 남아있다. 별것도 아닌 그 사건을 되돌리고 싶은 것도 잔상이 아직 남아 있는 것도 진심으로 대해준 사람들에 대한 그나마 미안한 미련일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다시 만나게 돼도 그때 일은 여전히 모른 척할 거란 걸 난 알고 있다.
모든 '척'은 사소한 것으로 시작해 버거운 부피가 되었다가 들통나 휘발 돼버린다. 그게 우습지도 않은 나를 더욱 가뿐하고 우습게 날려버릴 뿐이다.
대학생활은 잘난 척하며 놀기 좋아하는 내겐 재밌는 구석이 많았다. 인간관계 좋은 척 술을 마셔댔고 멋있는 척 담배를 피워댔다. 알바는 고사하고 힘들게 쥐여주신 용돈은 멋있지도 않을 옷자랑에 죄다 쏟아부었다. 지금은 새삼 필요성을 못 느끼기도 하지만 대학 이후 옷을 잘 사지 않게 된 건 평생 할 옷자랑을 그때 다했기 때문이다.
한겨울에도 웨스턴 부츠에 스키니 바지와 블랙 셔츠, 블랙 롱코트만 걸치고 언 몸을 담배로 녹이며 재수를 뿜어 없애곤 했다. pc방과 당구장은 오롯이 담배를 피우는 공간으로 그 나머지는 술과 담배를 마시고 뱉는 공간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특정해 몰려다녔다. 사소한 이유로도 술자리는 만들어졌고 재주껏 빠져나와야 할 만큼 마셔대기 시작했다. 1,2,3차는 기본으로 밤을 꼴딱 새워가면서. 눈치 없이 껴버린 술자리가 많았다는 것을 이제야 느끼곤 하지만 어쨌든 양껏 마시고 취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래서 실수는 늘 술자리에서 나오곤 했고 얼얼하게 취한 분위기를 깨 놓기도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실수가 아닌 '드러났다'가 맞는 표현이다.
대표적인 건 '술 잘 마시는 척'
난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
적당히 분위기는 즐길 수 있지만 잘 마시는 척 무리해서 늘 적당한 상태는 아니었다. 몸을 가누지도 정신을 가다듬지도 못했으며 여기저기 민폐를 끼치기 일쑤였다. 뭐가 그리 잘나 보이고 싶었는지도 모를 만큼 되지도 않는 주량을 잘난 척 덮어가며 몸을 혹사시켰다. 들키지 않으려 토하고 마시기를 수차례에 목에선 쓴 냄새가 입에선 피냄새가 올라왔다. 괜찮은 척 부여잡은 표정 속에 삼키지 못한 알코올로 입 안은 헐어갔다. 멀쩡한 척, 잘 마시는 척. 이유라고 해봐야 그런 분위기 그런 녀석들 틈에 끼고 싶다는 것뿐. 몸도 마음도 헐어버린 지금엔 이해도 안 되는 것들을 그땐 이해를 구할 새도 없이 해대기 바빴다. 맥주 500cc 첫 잔을 수 초에 마실 수 있다며 뻐기듯 들이키다 바닥에 죄다 쏟아낸 적이 있는데도 꾸역꾸역 가짜만을 삼키고 더 가짜들을 뱉어냈다. 때때로 진솔한 나를 발견할 때면 내가 어색해질 만큼.
무탈한 대학생활이 가능했을까 싶지만 겸손한 척, 나대지 않는 척 등 온갖 척들을 겸용했기에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는 한 뻔뻔하게 잘난 척 지랄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나마 남아있는 눈치를 이때 지켰어야 했다. 필수보조제처럼 잘난 척 해댈 때마다 일정양의 눈치가 날아가버렸으니.어쩌면 지금도 반성 어쩌고 하며 눈치 없이 질 낮은 글로 비웃음을 사고 있을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잘난 척하는 게 제일 못난 거다.
이제와 돌아보면 좋은 추억이며 아련한 기억들이 많아 보이기도 한다. 온통 얽히고설키긴 했어도 즐겁게 마시고 좋은 기억을 남긴 거라 생각도 된다. 하지만 거슬러 보면 난 붙잡을 기억들이 없다. 그 시절에 머무른 즐거운 추억들은 통째로 파이고 없다. 머무른 시간보다 가져갈 추억보다 사라질 흔적이 더 깊게 파여있다. 그 시절 함께한 기억이 그리운 건 남겨진 흔적을 공유했음에 얻어지는 것이지만 내겐 공유된 기억도 흔적도 없다. 잘난 척하며 그저 나 혼자만 쌓아갔을 뿐. 그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좋았던 기억을 찾아대는 외로움에 지친 지금의 내 모습일 뿐.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사라짐에서 오는 상실감을 차단하기 위한 괴로움의 자기 방어다. 그 괴로움은 외로움에서 기인하고 그 외로움은 사라진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스스로 만들어낸 거짓 시간들엔 흔적이란 없다. 당연히 거기엔 사라진 것도 있을 수 없다. 아무것도 아닌 나만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