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척척박사였다.

by 비밥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남들 다 하는 외식 한 번 한 적이 없... 었던 건 아니었다.

가난의 메마름이 똥구멍을 찢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여유로움에 빛나는 친구들도 보름달처럼 재지 않는 빛이어서 나름 그 시절 코뭍은 감성과 함께 하는 어우러짐이 들어있었다. 나 또한 부의 격차가 우정의 울타리를 나누지 않는 것에 섞여 있을 때라 넘사벽 금수저였던 도련님들을 코찔찔이 취급도 하고 되려 날고 기는 재수탱이로 눈치 없는 추억도 만들어 갔다. 어느 정도의 선긋기는 있었겠지만 확실히 지금보단 가난에 머뭇거리는 시절은 아니었고 돌아보면 순수한 미소가 앨범 첫 장부터 스멀거린다. 애써 가난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종종 비교되는 차이가 느껴질 때면 확인할 수 없는 있는 척으로 상황을 덮어버리곤 했다.


백수라는 보이지 않는 무거움에 짓눌려 사는 요즘. 늘어진 한숨 속엔 어릴 적 가난을 탓하는 비겁한 노림수가 가득이다. 요 모양 이 꼴은 흙수저 때문이고 빌빌거리는 삶의 성량 또한 가난 탓이라고. 비단 나뿐이 아닐 거라 자위하면서도 한심한 한탄으로 코 풀면 그만이라고. 반평생을 날려버린 것 같은 지금, 패배자의 피해의식이 또 한 번 기억의 채점을 오답으로 갉아 내고 있다. 그리고 그건 가난을 부정하는 척, 노력 없이 공부하는 척하던 내가 떠오를 때면 당연으로 탈바꿈되어 있다.




어릴 적 난 척척박사였다.


제법 똘똘한 눈망울에 기운 있단 소리도 주워듣고 명석함까진 아니지만 기대감까진 가져 볼 아이 축에 끼어 있었다. 단칸방에 딸린 미용실을 운영하는 어머니와 단칸방을 벗어나고자 애쓰셨던 아버지. 그리고 이불에 오줌도 갈기고 얼굴에 코피도 갈기던 애증의 동생. 단란하다면 단란하고 치열하다면 치열한 네 식구로 살아갔다.


네 평 남짓 의자 네 개. 어머니는 처녀시절 익힌 기술을 살려 호기롭게 미용실을 차리셨다. 물론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이만 아버지의 꾐에 넘어가 결혼한 후였다. 후일 다툼의 주가 내 말썽이기 전까지 줄곧 꾐의 잡기에 넘어간 자신을 탓해왔다. 미용실에 딸려있는 방은 세 평쯤에 그중 한 평은 다락방이었다. 첫째라는 이유로 내 차지가 되었으며 신비로운 아지트 같은 다락방은 공부에 대한 집중 대신 신비로운 잠만 쏟아내 내 처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한 평가량 되는 부엌은 요리, 목욕, 말썽 후 도망 같은 생존에 필요한 공간이었고 이렇게 채 열 평이 안 되는 조촐한 공간 속에서 가난에 대한 의식 없이 비벼가며 생활했다. 물론 내 의식이며 부모님은 의식하지 않은 날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다 가끔 먹는 맛난 음식도 어쩌다 사주시는 이름 있는 신발도 치열한 생활로 쥐여 준 것이었지만 한창 말썽피우기엔 부족한 지원이었다. 그나마 꽉 차게 채워진 건 동생과 나의 삶의 보따리였다.


늘 부족한 듯 채워주시는 부모님과는 다르게 하느님은 너그럽게도 동생에게는 머리를 나에게는 질투를 꽉 차게 내려주었다. 그것은 칭찬을 늘 목말라하게 했고 갈증은 꼬장으로 해소하게 했다. '척' 하는 내가 자라기 시작한 건 이때쯤이다. 언젠가부터 삶의 질을 의식하기 시작했고 가난에서 오는 눈치들을 인생 속에 재단하기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시작점은 동생이었다. 몸만 꿈틀대도 부딪히는 안쓰러운 공간 속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을 재물 삼았다. 이 가난에서 빛나는 총명한 저 동생을 흘겨보며 척척박사로의 여정은 질투를 양분으로 애정결핍을 채워 성장의 기근을 유발하고 있었다. 그리고 공부하는 척을 시작으로 착한 척, 센 척, 잘 사는 척, 아는 척 등 척척박사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가난함을 가리기 위해 아닌 척, 괜찮은 척을 섞어가며. 이유도 의미도 없는 주먹질을 섞어가며.


이 당시 내가 하는 모든 '척'은 관심받고 싶어 하는 결핍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결핍을 노력으로 채우지 못하고 요행으로 채우고 말았다. 공부하는 동생 옆에서 공부하는 척, 잘 사는 친구들 앞에서 잘 사는 척. 겁 많은 주제에 센 척.


무늬만 천주교 신자인 나는 아직도 은총이 충만하게 내려진 겁 많은 나를 발견하곤 한다. 미처 덜 큰 이 어른이의 심장은 뻔히 들통날 센 척하던 그때의 심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상대방의 멱살을 움켜쥐고. 눈을 부릅뜬 채로. 엄마 가게 앞에 끌고 와. 엄마가 봐주길 간절히 바라는.. 더 얘기할 거리도 못된다.




부모님은 치열한 경쟁으로 살아오셨다. 그 시대가 물론 그랬겠지만 가난에서 벗어나고자 애쓰셨다. 가난해도 할 건 하고 살자며 독려했다. 기죽지 말고 다니라 가르쳤다. 그래서 비교되는 삶의 질을 의식하며 일하셨다. 알 수 없는 경계가 쳐져있는 요즘과는 달리 그때는 인정으로 넘나들던 담벼락이었기에 동네 누구든 친구고 허물이 없던 시절이었다. 누구누구네 살림살이는 어떻다더라 잔소문도 쉽게 오가던 때다.


난 기죽지 말라는 독려를 기죽으면 안 된다는 어긋난 강박으로 덮어버렸다. 아버지는 회사 차를 운행하셨다. 소위 말하는 비싸고 멋진 번쩍이는 사장님 차. 초등학교 때 난 다리가 불편해서 보조기를 차고 다녔었다. 그래서 가끔 아버지께서 짬이 나실 때면 그 차로 데리러 오곤 했다. 위험을 감안한 부정이었지만 친구들 앞에서 난 그것을 부정했다. 저것은 우리 집 차라고. 아버지가 창피하지 않다고. 겉으로 얼버무리고 속으로 얼버무렸다. 아버지도 들으셨겠지만 별 대꾸 없이 지나갔다. 진짜인 척 하는 내가 싫었을지 그런 상황이 당황스러웠을지 본인을 탓했을지 꾸짖을까 고민했을지 모르지만 아마 온전히 나무라기도 일부러 해명하기도 씁쓸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친구들은 몰랐을까?

대부분 몰랐겠지만 또 대부분은 알았을 거다. 잘난 척 한다 느꼈을 테고 모르는 척 넘어가줬을 것이다. 워낙 작은 도시에 작은 동네 작은 학교니 알건 다 알고 모르는 것도 곧 알게 된다. 아는 척 하는 것이 아는 게 아니듯 모르는 척 한다고 모르는 게 아니다. 나 빼고 다 알고 내가 가장 잘 안다. 이게 점점 하다 보면 눈치란 게 없어져 다들 모를 거라 착각하게 된다. 뒤늦게 창피함이 밀려와도 모르는 척, 아닌 척 해버린다. 은근슬쩍 척척 해오던 것이 습관이 돼버린다. 습관은 고쳐진다. 재미만 붙지 않는다면. 꾀부림 정도의 재미라면 혐오적인 가짜는 막을 수 있다. 은근슬쩍에서 멈추는 게 가장 낫지만, 난 그러지 못했다. 학교에선 싸움 잘하는 척, 죽고 못 살아도 아는 척, 수업시간에 똑똑한 척, 가난해도 부자인 척. 돌아보건대 초등학교 시절 내내 재수라곤 찾아볼 수 없는 눈치까지 사라진 나로 지냈던 것 같다.




공부는 노력으로 되지 않음을 일찍 알아버렸다. 물론 공부하는 척 노력하지 않은 내 탓이겠지만 같은 시간을 두고도 반짝이는 눈망울에 번뜩이는 손놀림으로 문제를 풀어가던 동생의 잔상을 떠올려보면 지금도 내겐 어느 정도 증명된 명제가 아닐까 한다. 미용실과 연결된 방 문 하나를 열면 열심인 동생과 더 열심인 척 하는 내가 앉아있다. 어머니는 둘 다를 칭찬해 주었고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늘 거기에 더 집중했다. 놀고먹다 망치는 시험은 노력했음에도 안 되는 것과 당위성에서 크게 갈라진다. 얄팍한 잔머리지만 난 칭찬에 목말라 있었고 내겐 단비였다. 왜 노력하지 않았느냐 묻는다면 왜 노력해도 안 되느냐 반문하겠다. 이 또한 얄팍한 대답이지만 노력을 해봤단 정도로 얼버무리는 척 넘어가고 싶다.


확실히 난 끈기 있고 성실한 태도는 아니었다. 놀기 좋아해서 나돌기 일쑤고 잘하지도 못하는 구슬치기며 오락게임에 더 기웃거렸다. 그 집중을 잘하지도 못한 공부에 치중했더라면 좋았겠지만 나름 좋고 싫음이 분명해서 혼날 때도 딱히 변명을 대진 못했었다. 학년은 달랐으나 학교는 같았기에 동생 앞에서 너무 대놓고 나무라진 않으셨지만 성적의 편차가 너무 컸고 결과가 확연한데 과정을 확인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공부하는 척 날려버린 시간만큼 신뢰는 날아가고 있었다. 종종 좋은 성적으로 회복되긴 했지만 난 그 틈에 더 놀고 더 공부하는 척 일관했다. 동생은 보기 싫은 존재가 되어갔고 난 그것을 주먹으로 되갚았다.


몇 년 전 동생이 물었다. 왜 그렇게 못살게 굴었냐고. 생각해 보면 정말이지 못 살도록 괴롭혔다. 괴롭혔다는 말이 괴로울 만큼 양심도 없이 괴롭혔다. 늘 억울했을 것이다. 한 살 터울의 가증스러운 웃음을 고스란히 울음으로 받아냈으니. 부모님이 나무랄 때면 염치없이 이유 있는 척 변명했다. 하지 않는 게 나을 보기 싫은 변명이었다. 처음엔 물음에 딱히 답이 안 떠올랐다. 한 살 터울 남자형제가 으레 그랬겠지 했다. 근데 그건 칭찬에 대한 결핍도 동생에 대한 질투도 그렇다고 옹졸한 자격지심도 아닌, '척'하다 들통 나 버린 뜨끔함에서 오는 화를 푸는 지저분한 수작일 뿐이었다. 넓은 아량은 고사하고 알량한 질투만 꿰찬 동생보다 못한 형. 어이없게도 동생은 그냥 웃어넘겼다. 대충이라도 알았으면 됐다는 표정이었다. 알려준 것도 없이 미안함이 밀려왔지만 더 미안하기로 했다. 그냥 너무 미안해서..




첫째라고 잘해주는 부모님이 때론 고마웠다. 공부도 마음씨도 하다못해 건강도 부실한 자식을 기죽지 말라고 위해 주셨다. 가끔은 상황을 뒤집으면서까지 잘못을 덮어주셨다. 그때마다 스스로 느끼길 바란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기죽지 말라는 응원이 나에겐 조급한 다그침이 되어왔다. '이렇게까지 하고 있잖니' '열심히 공부해서 이렇게 살진 말아야지' 귀에 못이 박혀라 듣는 건 주로 나였고 귓등으로 흘리고 도망치기엔 세평은 너무 좁았다. 노력보다 빠른 칭찬이 필요했고 늘 공부하는 척으로 충당했다. 뻔히 드러날 꾀부림이 지금에서야 후회가 되지만 아직 난 그 부스러기를 가지고 있다.


꾀부림은 너무 쉽고도 달달하다. 결과는 차후의 나에게 던져버리면 된다. 지금의 나는 야무지게 씹어 넘기고 차후의 나는 매몰차게 씹혀댄다. 둘의 인과관계는 서로 탓하는 떠넘기기 뿐이다. 불안하고 미련한 선택이지만 당장의 현실도피와 자기 합리화엔 그만이다. 내 그릇이 이 정도겠거니 치부하면 떠넘길 때의 게으름은 더 이상 그릇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망가진 쳇바퀴 속에서 노력 없이 걷게 된다. 이런 순환엔 노력이란 의미가 없다. 습관처럼 어벌쩡 넘기다 주변 시선이 익숙할 때쯤 재미로 돌아서버린다. 잘못된 선행이 된다. 그럼에도 주변의 믿음은 살아있었다. 아직 어렸으니까.


나 또한 어릴 때니 귀엽게 봐줄 수 있다. 지금의 내가 나무랄 데 없다면 별 의미를 두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난제일수록 문제는 시작점에 있고 내 경우 같은 답으로 풀이 자체를 피해버렸다. 초등학교만큼은 아니었지만 고등학교까지 은근슬쩍 또는 작정하여 나를 가리고 나를 드러냈다. 공부하는 척을 무기로 관심과 칭찬은 동기로 어설픈 자기만족은 결과로. 막상 돌아보니 그렇다. 굳이 반성이랄 것도 없이 이것저것 '척'하며 못난이 인형처럼 이미지를 고정화해버린 건 아닐까. 뒤져서 나오는 교훈 따위는 없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쯤에서 그만 내 못난 기질과 부족한 깜냥으로 여기고 말아야 하는 걸까..



'그렇다'라고 단정하듯 확신해도 될지 모른다.

그냥 시간 낭비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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