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가 품은 세계』, 황선엽(2024, 빛의 서가)
위키백과에서는 ‘당근’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쌍떡잎식물 산형화목 미나리과의 두해살이풀. 홍당무라고도 하며 높이는 1m 내외이다. 오늘날 흔히 재배하는 당근과 비슷한 종류는 프랑스에서 개량되어 13세기까지 유럽에 널리 보급되었으며, 한국에 들어온 시기는 16세기 무렵이다.”
이처럼 한국에서 약 500년 동안 ‘주황색 채소’로만 알려졌던 당근은 1990년대 말, 인터넷 보급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채팅 용어가 급격히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당연하지’를 재미있게 비튼 ‘당근이지’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대중매체에서 연예인들이 이를 유행어처럼 사용하고, 예능 프로그램의 ‘당연하지’ 게임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당근은 채소의 의미를 넘어 언어적 유희로 확장되었다.
그렇다면 요즘 사람들에게 ‘당근’은 무엇으로 떠오를까? 아마도 중고 거래 플랫폼인 ‘당신의 근처’를 줄인 ‘당근’일 것이다. 하나의 단어가 긴 시간을 거쳐 변모해 온 과정을 살펴보면 그 시대상이 고스란히 보인다. 우리가 무심코 쓰는 단어들이 사실 우리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셈이다.
2024년 출간된 황선엽 작가의 『단어가 품은 세계』는 일상적인 단어들의 어원과 시대에 따른 의미 변화를 세밀하게 추적한다. 앞서 언급한 ‘당근’의 사례 역시 이 책의 서두를 장식한다. 작가는 단지 어원을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발음의 변화, 과거와 현재 의미의 차이, 오탈자가 굳어져 사용되는 사례, 심지어 잘못된 표기가 사전에 등재된 경우까지 파고든다. 대화 속에서 쉽게 휘발되어 버리는 ‘단어’의 역사를 오랜 시간 천착해 온 작가의 집념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보통 문장은 여러 단어가 연결되어 만들어지고, 우리는 그 문장을 통해 소통한다. 그래서일까. ‘단어’라는 존재가 물리적으로 작게만 느껴지곤 한다. 책이 성체라면 단어는 세포와 같다고 할까. 하지만 단어들은 우리 삶에 정착하기까지 구전과 기록의 형태로 어딘가에서 분명히 존재해 왔다. 때로는 화려하게 피어났고, 때로는 고요히 쇠퇴하면서 말이다. 한 단어에 깃든 깊은 역사를 마주하고 나니, 글을 대하는 태도가 경건해지기까지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만약 이 단어가 내 이름이라면, 내 삶은 어떻게 비춰질까?’ 하는 생각에 잠겨보았다. 내 이름이라는 단어가 좋은 의미로 쓰이는지, 삶의 어떤 국면에서 사용되는지, 혹시 오탈자 같은 삶은 아닌지, 시간이 흐르며 그 의미가 변색되지는 않을지 말이다. 이는 사후의 명성 문제가 아니라, 지금의 나를 객관화하여 바라보는 과정일 것이다. 마치 배우 김혜자 선생님의 이름을 딴 도시락이 가성비의 대명사가 되어 ‘혜자스럽다’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낸 것처럼, 우리 각자의 이름도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다.
책에서 만난 단어들을 곱씹으며 우리가 내뱉는 말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그 말을 뱉는 나 자신은 어떤지 새삼 깨닫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