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로가 불타서 녹아버렸다

by 머쓱




난로가 불탔어요.


문장이 이상합니다.

난로는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사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연탄도 아닌 '전기난로'가 스스로 불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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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있는 이 빨간 전기난로는 처음 들였을 때부터 애정이 갔던 물건입니다.

화이트 톤으로 꾸민 책방에서 소화기랑 이 난로만 쨍한 자기 색을 과시하고 있거든요.

심지어 소화기와 난로가 똑같은 색이라 연대해서 화이트에 저항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 난로가 엊그제 불타버렸습니다.


사건은 오후 7시쯤 책방 안에는 손님 두 분과 제 친구, 그리고 저를 포함한 네 명이 있을 때 벌어졌습니다.

손님이 계실 때는 벽걸이형 냉난방기를 일부러 끕니다.

아무래도 바람을 통해 실내 온도를 높히는 거라 건조해지거든요.

대신 이 빨간 전기난로를 켭니다.


그날도 빨간 전기난로를 켜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석유 냄새라고 해야 할까요, 전기난로를 맨 처음 켰을 때 났던 냄새가 났습니다.

이상하긴 했지만, 뭐 크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뭔가가 타는 냄새였다면 바로 일어나서 근원지를 찾았겠지만, 그런 냄새는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한참을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친구에게 말을 걸 겸 난로 옆으로 갔는데,

난로가 기우뚱해 보였습니다.


난로가 기울다니...?


보기에 난로의 한쪽이 눌려서 기우뚱해진 것 같은데, 웬만하면 그럴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친구와 말을 하며 살짝 곁눈질로 난로를 살폈습니다.

계속 제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분명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닫고 난로를 살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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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부분이 녹아있었습니다.

수상한 석유냄새의 정체는 플라스틱이 타서 녹는 냄새였던 겁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난로를 벽에 기대어 두었던 것도 아니었고,

사방에 공간을 많이 둔 상태에서 정말 혼자 불타버렸거든요.


그리고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일단 문장이 말이 안 되잖아요.


'난로가 불타다.'


그런데, 말이 안 되는 문장이라 그런지 자꾸 입 속에서 되뇌게 됩니다.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게 기능이지만 그러다 스스로 불타버린 난로...

언뜻 보면 장엄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불탔다기보다는 녹아버린 거라 비장함이 좀 부족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다가 못하고 맥없이 녹아버린 모양에 동질감도 느껴져요.

저도 당연한 것을 잘 못해내는 인간인걸요.


빨간 난로는 이제 좀 쉬라고 내버려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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