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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쓱 Nov 16. 2020

난로가 불타서 녹아버렸다




난로가 불탔어요.


문장이 이상합니다.

난로는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사물을 말합니다. 

그런데, 연탄도 아닌 '전기난로'가 스스로 불타다니...




책방에 있는 이 빨간 전기난로는 처음 들였을 때부터 애정이 갔던 물건입니다. 

화이트 톤으로 꾸민 책방에서 소화기랑 이 난로만 쨍한 자기 색을 과시하고 있거든요. 

심지어 소화기와 난로가 똑같은 색이라 연대해서 화이트에 저항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데 이 난로가 엊그제 불타버렸습니다. 


사건은 오후 7시쯤 책방 안에는 손님 두 분과 제 친구, 그리고 저를 포함한 네 명이 있을 때 벌어졌습니다. 

손님이 계실 때는 벽걸이형 냉난방기를 일부러 끕니다. 

아무래도 바람을 통해 실내 온도를 높히는 거라 건조해지거든요. 

대신 이 빨간 전기난로를 켭니다. 


그날도 빨간 전기난로를 켜 두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석유 냄새라고 해야 할까요, 전기난로를 맨 처음 켰을 때 났던 냄새가 났습니다. 

이상하긴 했지만, 뭐 크게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뭔가가 타는 냄새였다면 바로 일어나서 근원지를 찾았겠지만, 그런 냄새는 아니었거든요. 

그렇게 한참을 그냥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친구에게 말을 걸 겸 난로 옆으로 갔는데, 

난로가 기우뚱해 보였습니다. 


난로가 기울다니...?


보기에 난로의 한쪽이 눌려서 기우뚱해진 것 같은데, 웬만하면 그럴 일이 없잖아요?

그래서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친구와 말을 하며 살짝 곁눈질로 난로를 살폈습니다. 

계속 제가 잘못 본 거라고 생각하면서요. 

그런데 아무리 봐도 분명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닫고 난로를 살펴봤습니다. 

 



뒷부분이 녹아있었습니다.

수상한 석유냄새의 정체는 플라스틱이 타서 녹는 냄새였던 겁니다. 


어이가 없었습니다. 

난로를 벽에 기대어 두었던 것도 아니었고, 

사방에 공간을 많이 둔 상태에서 정말 혼자 불타버렸거든요. 


그리고 처음에 말한 것처럼 일단 문장이 말이 안 되잖아요. 


'난로가 불타다.'


그런데, 말이 안 되는 문장이라 그런지 자꾸 입 속에서 되뇌게 됩니다. 

주변을 따뜻하게 하는 게 기능이지만 그러다 스스로 불타버린 난로... 

언뜻 보면 장엄해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불탔다기보다는 녹아버린 거라 비장함이 좀 부족합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다가 못하고 맥없이 녹아버린 모양에 동질감도 느껴져요. 

저도 당연한 것을 잘 못해내는 인간인걸요. 


빨간 난로는 이제 좀 쉬라고 내버려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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