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에 한 번 들러야 하는 곳

Museum of Contemporary Art of Rome

by 머쓱

'나'의 거리를 소개한다고 해놓고 '타인'의 거리부터 소개해버렸다.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은 늘 하는데, 어떤 글을 써야 할까 고민이 많다. 새로운 생활에 적응한다는 것은 늘 그렇듯, 마음속에는 폭풍우가 치는데 막상 쓰려고 앉으면 말이 나오지 않아서 입만 오므렸다 폈다 할 뿐이다.


결국은 또 사람으로 글을 시작한다.


처음 이 곳에 왔을 때, 퇴사를 앞둔 선배가 있었다. 3주 뒤면 한국에 돌아가는 선배였다. 나에게 신경을 쏟을 여력도 없을 것이고, 그럴 필요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태생이 그런 것인지 참 친절했다. 이야기를 들어주고, 자기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 선배를 만난 것은 하루뿐이었다. 그날 하루, 두 번의 밥을 함께 먹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했다. 무엇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나는 책을 좋아한다고 답했다. 그러자 그 선배는 전자책을 읽다가 지치면 한국문화원에 가보라고 하셨다. 그곳에 도서관이 있고, 가입만 하면 책을 대여할 수 있다고 했다. 이 날은 로마에 와서 처음으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말한 날이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고, 어떤 친구가 있고,... 이런 이야기들은 생각보다 하기가 어렵다. 나에 대한 관심이 없는 상대에게는 불필요한 정보, 소위 말해 TMI(too much information)이다. 시간이 흐르며 다른 사람들과도 나를 드러내는 이야기들을 하게 되었지만, 처음의 기억은 뚜렷하게 남는다.


그 선배는 한국으로 돌아갔고, 나는 로마에 남았다. 고작 하루를 봐 놓고, 그 사람을 '안다'라고 할 수 없다. 하지만 짧은 대화 속에서 내가 받은 정보를 잊지 않았다. 전자책에 지치는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그 정도로 책을 읽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나만의 거리'가 필요해져서 한국문화원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Termini 역에서 내려서 버스를 타지 않고 걸었다. 20분 정도 걸으니 한국문화원이 나왔고, 들어가 보니 그 안은 지상낙원이었다. 책이 있고, 정수기가 있고, 깨끗한 화장실이 있고, 무엇보다 에어컨이 나왔다. 도서관 이용시간이 바뀌어서 월~금 12시부터 18시까지 들어갈 수 있다. 오랫동안 책을 고르고 10유로를 가입비로 내고 회원이 되었다. 한 번에 5권을 빌릴 수 있고, 기간은 2주다.

다 못 읽을 걸 알면서도 욕심내서 5권을 빌렸다. 책을 빌릴 때는 앞면을 펼치는 설렘에 가치를 둔다. 한 권을 다 읽고 마지막에 뒷면을 펼치는 건 성취감을 주지만, 그건 책을 살 때 기대하는 바다.


무거워진 가방을 들고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그 선배가 소개해 준 미술관 카페에 가보기로 한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MACRO(Museum of Contemporary Art of Rome)에 갔다.

들어가기 전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풍겨왔다. 감각적인 인테리어의 입구와 로비, 무엇보다도 사람이 없다. 하긴 예술을 전공하는 학생이 아닌 이상 '영원의 도시' 로마에서 이 구석에 있는 현대 미술 박물관에 방문하는 건 어려울 것이다. 굳이 사람 없는 곳을 찾아다니는 관광객이 아니라면 말이다.

1층에 있는 뮤지엄 숍은 굉장히 크고 볼 게 많았다. 예술 관련 서적이나 잡지, 굿즈도 종류가 많았다. 2층에 올라가 보니 카페에 학생들이 자리 잡고 앉아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카페에 음료는 평범했다. 현대 미술관에는 아이스 음료를 팔 정도로 모던한 분위기의 카페가 많은데, 이곳은 학교 매점 같은 분위기였다. 간단한 메뉴에 이용하는 사람들도 학생과 교수들 같았다. 하지만 그만큼 앉아서 책을 읽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커피를 파는 곳들을 CAFE가 아니라 BAR라고 하는데, 이곳은 한국의 카페와는 다르게 앉아 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정말 커피를 한 잔 하고 나간다. 물론 아닌 곳도 있다. 그래서 나는 오래 앉아 있고 싶으면 주로 미술관 카페를 이용한다. 그중에서도 이 곳은 정말 본격적으로 '앉아 있기 위한' 곳이다. 학생들은 이미 책을 펴고 있거나 노트북을 켜고 있다. 가방을 그대로 두고 화장실에 가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니 정말 대학교에 온 것 같다.

나도 카푸치노 한 잔과 함께 책을 편다. 한 입 마시고 나서 깨닫는다.


아, 이곳에 에어컨은 없구나.

갑자기 더워지는 기분이었지만, 여름이니까. 뭐.



이 책들을 다 읽어도, 다 읽지 못해도 2주는 지날 것이다. 도서관에서 대출을 한다는 건 타이머를 하나 갖게 되는 것이다. 가지고 있는 순간 타이머는 시작된다. 약간의 압박감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될 대로 돼라!'하고 기간을 연장하거나 책을 포기한다. 읽는 재미보다 빌리는 재미를 즐기는 나로서는 그 타이머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타이머가 종료되고 2주 뒤에 또 와야지.


그때는 더 더워질 테니 한국문화원에서 에어컨을 실컷 쐬고 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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