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저녁, 문을 닫기 한 시간 전 한적한 책방에서 저는 영화를 보고 있었습니다.
난로를 켜고 그 옆에 편안하게 앉아 스마트폰 액정으로 보이는 스위스의 풍경을 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책방 문을 열고 누군가 큰 박스를 안고 들어왔습니다.
'이 시간에 택배 기사님이 올 리가 없는데, 뭐지?'
손님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서 어서 오시라는 인사도 없이 멀뚱멀뚱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박스를 아무렇게나 내려놓은 그 사람의 다른 쪽 손에는 '부자 되는 집 벨벳데코' 화장지 30롤이 들려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내려놓은 박스는 귤 박스였어요.
네, 제 친구입니다.
서울시 용산구에 살면서 회사에 다니는 제 주변에 보기 드문 친구.
반차를 내고 집에서 쉬다가 차를 렌트해서 2시간이 조금 안 되는 거리를 와 준 친구.
여기서 보게 될 줄 몰랐던 얼굴이기에 정말 반가웠습니다.
직장인, 그것도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사회 초년생에게 반차를 쓴 하루는 어마어마한 의미인 걸 알기에 고마웠습니다.
그 친구가 책방을 둘러보며 말합니다.
"하나하나 다 신경 쓰느라 고생했겠다."
저는 그 말에 뻔뻔하게 인정을 하며 아주 고생했다고 답했습니다.
그 친구가 카운터에 있는 화병을 보며 말합니다.
"물건 하나하나가 다 예쁘다. 잘 골랐네."
이번에는 뻔뻔하지 않게 말합니다.
그건 내가 고른 게 아니라고.
카운터에 있는 예쁜 나무 화병은 소정이가 개업 선물로 준 것입니다.
커피를 타는 곳 뒤에 있는 데이지 꽃이 그려진 접시는 혜인이가 선물해줬습니다.
LP판 꽂이에 있는 것 중 냇 킹 콜의 흰색 LP는 화정 씨가 바이닐 가게에 가서 주인에게 물어보고 사다 준 것입니다. 티코스터는 효정이가 제가 뭘 좋아할지 모르겠어서 자기 취향대로 샀다며 선물했습니다. 행거 옆에 놓인 화분들은 친언니와 현지 언니의 선물, 테이블에 놓인 화분은 지윤 언니와 하람이의 선물입니다.
이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주고 간 물건들로 공간이 채워졌습니다.
책방을 열기 전에는 '내 취향으로 가득 채운 공간'을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열고 나니 취향이라는 건 물건이 아니라 옆에 있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옆에 있는지가 저의 취향이었습니다.
오늘은 '부자 되는 집, 벨벳데코 30롤'이 제 취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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