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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다 Sep 16. 2019

꾸며진 삶, 편집된 삶

얼마 전, 야외 촬영 현장에 갔다. 낮 씬을 몇 개 찍고 더위에 지친 촬영팀은 휴식 시간을 가졌다. 어스름이 내리기 시작하자 밤 씬을 준비했다. 날이 좀 시원해지자 그제야 주변 풍광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기에 조명까지 세팅해놓으니 나는 이내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매우 현실적인 풍경에 인공적인 조명이 더해져서 비현실적인 공간에 서있는 것 같았다.


꾸며내는 일을 한다.

내가 하는 세트디자인이 그렇다.

방송미술의 세계에서 자연스러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워 보이고 진짜 같아 보이는 꾸며진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실제처럼 보이기 위해, 하지만 좀 더 극적으로 보이기 위해 애쓴다.

CG를 지양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처럼 부지를 사서 옥수수를 심고 길러 3년간 진짜 옥수수밭을 조성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인터스텔라), 자본과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 우리는 좀 더 급박하고 간편하게 그러나 진짜 같고 멋져 보이는 방안을 고심한다.

처음엔 그게 적응이 안 됐다. 가뜩이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나로서는 더더욱. 그냥 이대로도 괜찮은데 왜 자꾸 화분을 가져다 두고, 색을 칠하고 구조를 만들어 덧붙이고 간판을 세울까?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컷 하나로 설명 할 수 밖에 없으니까. 영상 속에 설명이 깃들어야 하는 것이다. 미적으로 꾸며져야 영상이 더 눈에 들어오고 시청자를 사로잡을 수 있을 테니까. 어색하지 않도록, 그리고 많은 말이 필요 없이 장면 하나로 극 속에 몰입할 수 있게 기능해야 하니까.


나는 세트의 앞면에만 신경을 쓴다. 화면에 담기는 부분이니까. 하지만 뒷면도 자주 마주하게 된다. 세트의 앞면은 내가 디자인한 형태나 마감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벽돌이나 시멘트 마감처럼 보이는 것들, 도배지나 시트지, 칠로 마감된 벽이다. 하지만 뒷면은 합판과 각재, 못 등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 민낯 앞에서 나는 꾸며지고 편집된 삶에 대해 생각한다. 일에 허우적대던 지난 몇 년을, 많은 걸 포기하고 지낸 시간들에 대해서 생각한다.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땐 모르다가 찬찬히 주변을 둘러보니 이 일의 특성상 오로지 일 밖에 모르고 세상물정 모르는 것 같은 사람들이 많아 보였다. 미술감독이라는 그 위치와 타이틀을 봤을 땐 멋지고 대단해 보이지만, 그것을 걷어내고 보면,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세계에 빠져있거나 공감능력이 떨어지거나 화가 많아 보였다. 어딘가 결핍이 있는 듯 했다.

이내 두려웠다. 나도 그렇게 되는구나. 괴물이 될까봐 겁이 났다.

물론 회사에서 본 모습에 국한 되어 있기에 단언할 수는 없다. 일하는 곳에서만 본 내 모습도 누군가에겐 괴물 같을 수 있다. 회사 문 밖을 나서면 친구들, 부모, 자식들에게는 누구보다 좋은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회사에선 일을 잘 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기본적인 존중이 결여된 사람들을 보면서, 사람을 저렇게 만드는 일의 거대함과 무거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핍들은 일반적이고 다양한 삶의 조각들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삶의 풍파를 많이 겪어보고 싶고, 많은 것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20대 때부터 계속 해 왔다. 정말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 들으면 내가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를 하는 어린애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만 많은 나로서는 경험이 절실했고, 직접 해봐야만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20대 때 깨달았다. 30대가 되고 나니 그 경험조차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있다.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나의 한계를 알고 조금은 몸을 사리게 된 나는, 그나마 조금이라도 가늠해보려고 차선으로 간접경험을 택하거나 할 뿐이다.

하지만 이것도 내 체력과 정신이 허락할 때에 가능한 일이다. 지난 몇 년은 일 외에 많은 것을 놓치고 지냈다. 다른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편집되고 다듬어진 삶을 살았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처럼 달렸다.

화면에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세트디자인을 하고 있지만, 세트 뒷면, 세트를 튼튼하고 안전하게 지지하기 위해 마구 덧박아놓은 각재와 합판들처럼, 인생에 다양한 면을 경험해보고 체득하고 싶다. 그를 통해 따뜻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 생각을 이제야 조금씩 실행에 옮기려는 참이다. 드디어 마음의 여유가 조금씩 생겼고, 한편으론 이대로 가다가는 나중에 후회할 것 같아서 움직이게 되었다.

어찌되었든 작은 움직임을 시작하게 되고, 무거운 발걸음을 비로소 뗄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일에서 약간의 여유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일의 숙련에서 오는 것일 수도 있고 내 정신이 더욱 건강하고 튼튼해졌다는 반증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일적으로 나를 갉아먹지 않을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어야 마음의 여유도 따라 오는 것 같다. 그 구조의 변화 속도가 더디지만 조금씩 진행되고 있는 것 같아 희망을 가져 본다.

가장 중요한 건 내 마음가짐일 것이다. 여유로움을 찾으려는 마음가짐.

어쩌면 내 일을 더 잘 하기 위해서 별로 필요하지 않은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게 나의 딜레마다. 착하면서 일을 못하는 사람에 대한 고민과도 같달까. 왜 일 잘하고 나쁜 사람만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

하지만 마음 속에 하나 품은 신념 같은 것을 끝까지 지켜나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 최소한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그리고 그 최선이 경험이어야만 하는 내 특성을 알기에, 주어진 것 안에서 최대치로 경험하고 싶다. 최소한의 내 양심을 위해, 내 심신의 안정을 위해, 내가 싫었던 것을 답습하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을 계속 해나가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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