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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체다 Sep 16. 2019

핑크 스파크 -1-

'저 멀리서부터 부왕-!!! 하고 큰 소리가 나길래 엄청 큰 트럭이 오는 줄 알았어!'

외부 스튜디오에 차를 몰고 갔더니 인테리어팀 조장님이 뛰어나와 말했다.소리와는 다르게 작고 귀여운 차가 왔으니 얼마나 어이 없어 하시던지. 한참 웃었다.

자동차를 사서 몰고 다닌 지 1년이 되었다.

중고 스파크다. 흔치는 않지만 그래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메탈 핑크 컬러다.

회사 사람들은 나와 잘 어울린다고 했다. 난 여성스러운 것과는 거리가 멀어서 분홍색을 멀리해왔고 딱히 좋아하는 색도 아니다. 그런데 잘 어울린다니. 하긴, 내 별명이 '종이 인형'이다. 나풀나풀 연약해 보이는 이미지와 컬러의 차 아닐까.  


운전면허는 2012년 말에 취득했지만 실제로 운전을 하기까지는 몇 년이 더 흘러야 했다.

이명박 정권 때 낮춰진 운전면허시험 난이도의 문턱은 내가 면허를 따던 시기에도 유효해서, 별 연습 없이 쉽게 합격할 수 있었다.

운전면허증이 생겼는데 운전을 못했다.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을 내 지갑 속에서 잠들어 있던 운전면허증은 가끔 술집에서 주민등록증의 대용으로 내밀 때나 바깥 세상 공기를 맡을 수 있었다.


'아! 맞다. 넌 운전 못하지?'

'너도 운전 할 줄 알면 참 좋을 텐데.'

이런 말들을 회사에서 듣다 보니 점점 스트레스는 가중됐다.

야외 현장에 가거나 세트를 멀리 외부 창고 스튜디오에 짓게 되면 매번 운전해서 오가는 것이 우리의 일 중 하나였기에 운전은 거의 필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런 소릴 듣는 것보다 더 싫은 건, 선배들의 차를 얻어타며 나도 모르게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운전을 못한다는 괜한 죄책감으로 몇 년을 보내다 스스로도 운전이 절실해졌다.

혼자 촬영 장소를 가려고 지도 앱을 켜서 검색할 때마다 운전을 잘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지하철이나 버스로는 2-3시간 걸리는 거리를 차로는 1시간 정도로 충분히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먼 길을 돌아 가자니 몸이 힘들었고 시간이 아까웠다.


'나 운전해야 하는데...'

운전은 무서워서 시도도 못하면서 운전해야 한다고 걱정만 늘어놓으니 보다 못한 아빠의 아침 동행이 시작되었다. 출근길에 차를 몰고 집에서 회사까지 가는 것이다. 조수석에 앉아 아빠는 화를 내다 참다, 안절부절하기를 반복했다. 어쨌든 한 달을 반복하니 실력이 늘어 혼자서도 다닐 정도가 되었다.

운전을 해결하니 다음 문제가 도사리고 있었다. 내 차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빠는 집에 있는 차를 몰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아빠도 가끔 차가 필요한 날이 있었다. 내가 써야 할 날과 아빠가 써야 할 날이 자주 겹쳤고, 나는 회사 차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내가 써야 할 날에 남아있는 차는 흔치 않았고 그마저도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를 테면, 유리창이 깨져있는 차, 공기압을 채워줘야 한다는 경고등이 뜨는 차, 예전에 후배가 몰다 대파했다 고쳐서 그 속을 알 수 없는 차, 후배가 몰고 가다 급 타이어가 터져버리는 무시무시한 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매번 새롭고 다양하게 위험한 차를 몰며, 어쨌든 남의 차를 가끔 운전하는 셈이니 적응하기 어려웠다. 운전 실력이 다시 퇴보했다. 그렇게 고민만 늘어놓고 있자니 또다시 아빠가 구세주처럼 등장했다. 아빠 성격이 더 급한 건지, 해결해주려는 부모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건지, 어쨌든 부모님과 중고차 센터에 갔다. 인터넷으로 보고 간 저렴한 모닝이 알고 보니 한 바퀴를 뒤집어져 구른 차였고 껍데기를 다 새로 교체한 차였다. 사고 이력은 없었다. 차량 내부 부품을 교체한 게 아니면 사고 이력이 0인 게 맞다고 했다. 다 옳은 말이긴 했으나 어쩐지 섬뜩해져 놀란 우리는 토끼 눈을 하고 재빨리 다른 차를 찾아 헤맸다. 딜러가 3번째로 데려간 곳에 메탈 핑크 스파크가 있었다. 엄마, 아빠는 '색깔 예쁘네!' 라고 했고, 나는 속으로 '안 예쁜데...' 하고 있었다. 연식이 오래된 것 치고 km 수를 별로 안 뛰었다고 했다. 우리는 시승을 했다. 주차장을 한 바퀴 도는 일종의 의식을 거치며, 부모님은 마음을 굳혔고, 나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사실 할부를 싫어하는 부모님 덕에 현금 구매를 하자니 부모님의 지원이 필요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하여 결국 나는 '색깔이야 뭐, 별 상관 있나?' 싶은 마음이 되었다. 그렇게 핑크 스파크는 내게로 왔다.

하지만 스파크+핑크 컬러의 조합은 무법자들이 판치는 험난한 도로라는 링 위에서 약체였다. 조금만 우물쭈물하면 여기저기서 빵빵 경적이 울렸다. 추월해서 가거나 공간이 뻔히 좁아 보이는데도 무리하게 머리를 들이밀었다. '날(정확히는 핑크 스파크를) 무시하는구나' 싶은 차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다. 이제 운전이 익숙해지고 나니 무시하는 차를 좀 덜 보게 되었지만 아예 없어진 건 아니다. 아무리 밟아도 속력이 안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도로의 질감이 느껴질 것만 같은 거친 승차감과 엔진 소리가 너무 커서 노래를 더 크게 틀게 되어 차 안은 콘서트장이 된다. (이건 장점인가?) 전화가 걸려오면 스피커폰 모드로 켜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야 통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장점도 많다.

톨게이트 비가 50% 할인된다.

주차가 쉽다. 서울 한복판 주택가에 갔을 때, 다른 차들은 엄두를 못 낼 공간에 주차하기도 했다. 아빠의 큰 차를 몰고선 꺼려지던 서울의 골목골목을 쏘다니는 것도 가능해졌으며, 남들이 공간이 애매해서 주차 못하고 비워둔 우리 아파트 좁은 주차장 칸에도 쏙쏙 잘 집어넣게 되었다.일을 하다 부득이하게 시트지나 도배지, 혹은 장판 같은 것을 실어서 보내줘야 할 때가 생긴다. 처음엔 내 차의 작고 아담함을 피력하며 조장님들께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다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시트지 정도는 거뜬히 실을 수 있는 의외로 넓은 아량을 가진 차라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짐을 못 싣는 것이 장점인 줄 알았는데, 몇 가지 아이템은 실을 수 있다는 게 급할 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모른다. 그렇기에 적당히 몇 가지 아이템은 실을 수 있다는 건 장점이 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한식 문 몇 개와 장판을 실어보려다 실패했다. 역시 안되는 건 안되는 거였다. 내 차가 도라에몽 주머니도 아니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핑크스파크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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