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가 있다.
차에 누굴 못 태운다. 특히 옆 좌석에 누군가 타면 안절부절 평소보다 더 운전을 못한다.
지금은 좀 나아진 것 같은데 확인해 볼 길이 없어 (정확히는 확인해 보고 싶지 않아서) 확실하진 않다.
트라우마의 기원은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는 주말마다 서울 집에 왔다가 일요일이면 인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늘 운전이 미숙해서 걱정을 늘어놓던 나에게 운전 연습을 해보면 어떻겠냐 하길래 나는 쏘카를 빌려 며칠 몰기로 했다. 그는 나에게 운전을 해서 데려다 달라고 했다. 그럼 운전 연습도 되고 좋지 않겠냐고. 어느 정도 거리도 꽤 되고, 초행길이니 운전연습이 될 것 같았지만 망설여졌다. 혼자 운전해도 무서운데 누굴 책임지고 태우는 게 두려웠다. 혹시나 사고라도 나면 나 혼자면 괜찮지만 옆에 탄 사람은 무슨 죄인가. 평소의 나라면 거절했겠지만 그만큼 운전 연습이 절실했고 더불어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버스를 타고 힘들게 가느니 내가 잘 태워서 데려다주면 좀 낫지 않을까? 회사에서도 가끔 선배를 태우고 장거리 운전을 한 적도 있으니까 괜찮을 것 같았다. 고민 끝에 어렵사리 승낙했다.
그러나 차에 그를 태우고 가는 내내 그는 무섭게 소리 지르며 화를 냈다. 내 운전 방식이 너무 위험했기에 이해는 됐지만 그런 그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어 충격의 연속이었다. 결국 간신히 도착했지만 서러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쏟아졌다. (어쩌면 그는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무서워서 화를 낸 것일 지도 모른다.)
이미 삐그덕 거리며 관계에 균열이 생기던 시기에 그런 엄청난 사건(?)을 겪고 나니 내 머리 속에 있던 끈 하나가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연락이 점점 뜸해지고 서로에게 무감해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그 날 이후 그가 야간 근무로 생활 패턴이 바뀌었고 나도 작품 준비로 바빠졌다. 혼자 하나 둘 마음을 정리하던 나는 이별을 고했다. 차에 태웠기 때문에 이별하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날 이후 만나지 못하고 헤어지게 되자, 차에 누군가를 태우는 것이 트라우마가 되었다.
회사에 한 후배는 '선배, 조수석에 인형을 놓는 것부터 시작하는 건 어때요?'라고 했다. 인형이라... 전혀 사람 같지 않고 푹신하고 포근해서 좋을 것 같다.
그냥 이건 나의 성격 탓도 있는 것 같다. 극도로 누군가에게 폐 끼치기 싫어해서 거리를 두고 싶어한다. 그래서 선배들에게도 열심히 얘기하고 다닌다. 내가 옆좌석을 내어주지 않고 혼자 다니는 것은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태우기 싫어서가 아니라고. (싫은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트라우마를 언제쯤 극복할 수 있을까. 차를 능숙하게 몰게 되니 그전과는 다른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그렇게 무서워하던 운전이 익숙해지니 이동반경의 차원이 달라졌고, 혼자 음악 듣기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음악감상실이 되었다. 이젠 차 없이 나오면 불편하고 힘들 지경이다.옆 자리에 누굴 잘 태울 수 있게 되면 또 다른 차원의 세계가 펼쳐질까?
어찌 되었든 아직까지는 혼자 모는 핑크 스파크가 좋다. 예전에 어떤 이가 자신의 아반떼를 ‘아방이’라 애칭을 붙여 부르는 것을 보고 그땐 ‘유난스럽다.’, ‘귀엽다.’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나 이해가 된다.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어떤 선배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집안일을 자신이 덜 하기 위해, 그리하여 남는 시간을 여가로 활용하고자, 온갖 가전제품의 신봉자이다. 집에 있는 로봇청소기가 뽈뽈대며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을 보면 꽤 귀엽다고 했다. 이러다 로봇청소기의 생일을 축하해주게 될지도.
나도 요즘 핑크 스파크가 반려동물까지는 아니어도 애완동물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야외 현장 중 특히 시골에 가면 한 켠에 세워둔 내 핑크 스파크가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더우면 잠시 에어컨을 틀고 들어 앉아 쉬면 되고, 마땅히 야외에 앉거나 기다릴 장소가 마땅치 않을 때도 제격이다. 도심과 다르게 편의시설이 다 멀리 떨어져있어 이동하기에도 좋다. 무엇보다 적당히 슛이 들어가면 나의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집에 가고 싶어지는데, 조용히 도망치기 좋다. (조용히 도망치기엔 엔진 굉음이 너무 크다.)
지금은 옆 좌석이 가방과 책으로 쌓여 있다. 어제는 집에 오는 길에 문득 옛날 드라마에 많이 나오던 장면이 생각났다. 급정거 시 다칠까 봐 옆자리의 연인을 보호하기 위해 팔을 뻗어 막아주는 제스처 말이다.
나는 아파트 지하주차장 비탈을 내려가며 편의점 다섯 캔 만원 맥주가 담긴 비닐봉지를 팔을 뻗어 막는다. 비닐봉지에서 맥주가 튀어나오는 것을 보호하기 위해.
언젠간 내게도 새로운 차원의 세계가 열리겠지.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니까. 겪게 되면 새로이 알게 되겠지.
가끔씩 꿈꿔 본다. 친한 친구들 둘을 더 태우고 신나게 달려 캠핑을 가거나, 바닷가로 놀러 간다거나 하는 상상. 언젠가는 가능해질 것이고 그 세계는 지금과는 또 다른 피로와 또 다른 즐거움을 줄 것이다.
핑크 스파크는 나이도 꽤 많다. 내가 평소 빨빨거리고 돌아다니는 km 수를 보아하니 금방 10만 km를 찍을 것 같다고, 새 차를 위해 돈을 모으라고 부모님은 얘기하신다.
그렇다. 하지만 당분간은 난 핑크 스파크와 이곳저곳을 누빌 것이다. 조그마한데 시끄럽고 보기엔 유약해 보이는 외모에 이리저리 치이는 약체인데 실은 제법 튼튼한 그 속성이 날 닮은 것도 같다. 몇 년이 될 지 모르지만 너의 수명이 허락하는 날까지 잘 지내보자, 핑크 스파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