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가 그랬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나이를 먹을수록, 이 말이 얼마나 친절하고 묵직한 문장인지 여실히 깨닫는다.
그가 아테네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전해왔던 수많은 이야기를 한 문장으로 축약한다면 그것은 [나 자신을 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안다는 것, 나 자신에게 진실하고 정직하다는 것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고되고 괴로우며 두려운 일이다. 그 어려움을 프로이트를 포함한 정신분석학자들이 말했고, 무의식의 깊이를 융을 포함한 분석심리학자들이 말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말해준 건 일종의 처방전이다. 소크라테스가 태어나 바라본 세상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개인의 실천 방안인 셈이다. 네가 느끼는 세상 대부분의 문제는 그냥 너 자신을 알면 해결된다. 얼마나 쉽고 친절한 가르침인지 모른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광장에서 하루 종일 떠들어댄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는 수많은 방어기제의 벽을 넘는 일이다. 내가 틀렸음을 인정하는 일, 나를 믿어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일, 내가 모르는 나를 만나는 일, 내가 억누르고 있는 다양한 부정적 감정을 느끼는 일, 나는 알고 싶지 않았던 세상의 진실 혹은 사실을 알아가는 일, 호기심과 사랑으로 내 마음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일. 그리고 나를 오롯이 이해한다는 것은 나의 행동을 바꾸는 일이며, 나의 인간관계를 바꾸는 일이며, 나의 세상을 바꾸는 일이기에 나를 만나지 않아 왔던 사람일수록 많은 변동과 리스크를 감내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누군가는 타인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만나야만 하고, 때로는 타인에 대한 공격성을 드러내며 관계가 틀어지기도 하고, 억눌렀던 감정들이 올라오면서 몸이 크게 아프기도 한다.
현대 사회의 '너 자신을 알라.'는 좀 더 실용적으로 변했다. 어른들은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어차피 먹고살기 위해 일해야 할 거, 네가 좋아하는 거 찾아서 해라. 네가 좋아하는 걸 찾아라. 그러기 위해 너 자신을 알아가라. 고 한다. 어떤 청소년들은 그런 어른들의 기조에 반기를 들기도 한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꼭 알아야 하나요? 그냥 살면 안 되나? 좋아하는 게 없어요." 어른들은 자신의 삶에 아쉬움과 아픔을 반영해서 다음 세대가 덜 힘들었으면 하는 마음에 하는 조언이지만 자라나는 세대는 어른들의 말이 또 자기중심적인 참견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또 자라나면 모른다. 일이 힘들고 고된 것임을 느낄 때, 조금이라도 내가 좋아하는 걸 했다면 달랐을까? 하는 뒤늦은 후회가 들지도 모른다. 지금의 어른들처럼.
일은 노동이고, 노동은 힘을 쓰는 일이라 괴롭다. 괴로우니 자꾸 내면을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이 일이 싫은가? 요즘 왜 이렇게 마음이 공허하고 허전하지?' 때로는 다른 곳에서 원인을 찾기도 한다. 내가 사람들을 잘 안 만나서 그런가? 결혼을 할 때가 된 건가? 이게 다 월급이 적어서 그래. 저 사람이 협조를 잘 안 해줘서 등등. 일부분은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가 일을 하고 있는 이유는, 나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소크라테스처럼.
우리가 매일매일 즐겁고 행복하고 편안하고 아~무런 고통이 없다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을 들여다볼 동기조차 없을 것이다. 일의 괴로움, 그 속에 담겨있는 크고 작은 많은 요소들의 괴로움. 괴로움을 나침반 삼아 혹시 내 잘못 걷고 있는 것일까? 하는 그 감각.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모르겠고, 그걸 내 스스로 헤집어 풀어내기가 두려우니 음식, SNS, 관계, 외부 지식 탐독, 재산 등등으로 주의를 돌리고 마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노동시간이 인간에게 주는 답답함과 괴로움은 '너는 너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신호다. 일과 관련해서 누군가에게 이러쿵저러쿵 참견을 하고 있을 때에도 '지금 그 행동을 하고 있는 이유가 뭔지 너 자신을 먼저 들여다보아라.'는 신호다. 누군가 나에게 일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할 때 반기를 들고 싶을 때에도 '너는 왜 저 사람 말이 그렇게 거슬리는지 너의 내면에서 이유를 찾아라.'는 신호다. 일이 그렇게 힘들지 않고 버틸만하다면 지금은 마음을 알 때가 아니고, 몸으로 경험하는 것만으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언젠가, 일과 관련된 회의와 공허함이 찾아온다면,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찾아온다면, 그것은 더 빨리 성숙해질 수 있는 기회이다.
그러니 일을 하는 동안 우리가 느끼는 답답함과 괴로움은 너무나 타당하다. 앞으로 몇 날, 몇 개월, 몇 년을 더 이 감정과 함께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를 기회가 내가 나를 더 궁금하게 되었다면, 소크라테스는 그걸로 좋은 변화는 시작되었다고 말해줄 것이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인류에게 던진 처방전은 삶의 본연 의미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는 나를 알아가려고 태어났고,
그 동기를 알아차리기 위해 '너'가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수많은 '너'가 만나서 도시를 이루고, 사회를 이루고, 문명을 이루어서, 우리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가며 제대로 남들과는 다른 '나'를 알아가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내 마음에 담겨있는 이중성과 다채로움을 이해하게 된다면,
나와 다를 줄 알았던 사람들의 마음도 깊은 곳에서는 나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글을 적다 보니 문득 궁금해진다. 그런 세상에선 어떤 '일'이 생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