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외로움은 용기를 낳기도 한다.

답장 받지 못한 수많은 편지들에 대하여

by 무오



언제부터 였을까? 얼굴보고 하지 못할 말들을 편지에 적어 보내기 시작한 건.


편지지 한 장을 다 채워 보내기 시작한 태초의 기억은 초등학교 6학년이다.

그냥저냥 친한 여자아이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전학을 왔는데, 얼굴에 반항기가 가득했던 아이였다.

당시에 있었던 일진 무리들과 언젠가부터 같이 다니기 시작했지만, 학급 친구들에게 나쁘게 굴진 않았던 아이.

다만, 선생님들에게 좀 반항적이었다는거?


그래서 선생님은 당시 학급 임원이었던 나에게 그 친구를 잘 챙겨주라고 넌지시 일러주었고, 나는 그 이후로 그 친구와 자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언제였지.. 일진 무리들과 그 친구가 싸웠을 때였을까.

그 친구가 눈물을 흘렸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좀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는데, 자기 집 상황을 나에게 이야기해주었다. 부모님관계가 많이 안 좋다면서.


집에 와서도 그 친구가 계속 생각이 났다. 우리집도 부모님 사이가 엄청나게 나빴기 때문이다.

웹툰을 보는데 거기 나온 대사를 그 친구에게 전해주고 싶었다.


그 친구와 나는 버디버디 친구도 아니었고, 네이트온을 주고 받을만큼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

휴대폰도 없을 시절이라, 나는 고민했다. 이 이야기가 그 친구에게 위로가 될 것 같은데. 너무 참견일까?


줄지말지는 차치하고, 일단 무작정 편지를 썼다. 뭐라고 썼는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난다.

겉보기에 날카롭고 무서워보이는 괴물의 모습이지만 사실 그 속엔 연약함과 외로움이 있었다더라 하는.. 그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다음 날 한참을 망설이다가 학교 수업이 끝나버렸다. 차마 그 친구한테 얼굴보고 줄 자신이 없어서, 내 이름도 적지 않고, 신발장에 있는 걔 신발에 편지를 몰래 넣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걔는 그 편지를 내가 줬다는 걸 알았던 것 같다. 날 대하는 그 친구의 태도가 한결 편안해지고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친구는 내 편지에 답장을 해주지 않았다. 편지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한참 지나고나서야, 왜 걔가 일진무리 밖에 없는 생일파티에 날 초대했는지. 싸이월드 일촌 신청을 했는지. 초등학교 졸업하고부턴 사는 동네가 완전 달라져서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날 자기 집에 초대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친구와의 일화가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던 모양이다.

나는 종종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편지 경력은 꽤 오래돼서, 이제 편지를 잘 쓴다는 소리도 듣는다.

편지를 주고 받기가 자연스러운 관계들도 생겼다. 나는 아직도 그들이 써준 편지들을 버리지 못 하고 집 한 켠에 차곡차곡 쌓아둔다.

여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편지로 적어 넌지시 건네기도 하고, 좋아하는 사람에게도 좋아하는 마음을 편지에 담아 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가 편지를 받는다고 해서 답장을 보내진 않는다. 편지에 담긴 나의 부탁을, 나의 의문을 답해주지도 않는다.


어머니와 사이가 나쁜 아버지에게도 수없이 편지를 썼다. 건강 생각해서 담배 좀 끊으라는 말. 왜 엄마랑 그렇게까지 싸우는지, 아빠의 진솔한 속 얘기가 궁금하다는 말. 공부 열심히 해서 효도하는 큰 딸이 되겠다는 말. 차마 얼굴 보고 할 수 없는 낯간지러운 말들을 적었다. 사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저 너무 외로워요. 저 좀 사랑해주세요." 였는데 그 말을 못 했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편지에 대한 답장을 받은 적은 없다.

그 상처가 오래 가서, 아버지를 오래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래도 나는 편지를 썼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싸운 친구에게. 미운 부모님에게. 기타 등등.

말을 걸러 다녔다. 우리 얘기 좀 하자고. 선을 마구 넘었다.


너무 외로웠기 때문이라고, 지금은 막연히 생각한다.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누군가의 외로움이 눈에 밟혔던 것이라고.

외동에 부모님까지 이혼한 또래 친구의 마음을 나도 알 것 같아서.

혼자 타 지역의 재수 기숙학원으로 떠난 친구의 쓸쓸함을 알 것 같아서.

맘 같지 않게 자꾸 사이가 틀어지는 아버지가 짠해서.

대화하면 금방 풀릴 것 같은데, 말 걸었다가 거절 당할까봐 겁이 난 친구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나도 엄청난 겁쟁이지만,

너무 외로웠기 때문에 용감한 사람이 된 것 같다.

외로운 사람을 혼자 두지 않으려고.


나의 편지가 비웃음 당하고, 오글거린다는 말을 들은 적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말 한 마디가 마음에 깊게 사무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된 거라고 생각하며,

지금도 상담을 마친 아이들에게 편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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