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 애니메이션 영화 <소울>에는 영혼의 세계와 지구를 오고 가는 능력자가 한 명 나온다.
그는 뉴욕 길거리에서 피자 가게 홍보 판넬을 현란하게 돌리는 한 노인으로, 영혼이 뒤바뀌는 사건에 휘말린 주인공들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결정적인 조력자 역할을 한다.
내가 그 영화를 더욱 사랑하게 된 건 바로 그 할아버지 캐릭터 덕도 있다.
화이트 칼라, 블루 칼라의 위계가 흐릿해진 현대사회라지만 여전히 길에서 돈벌이를 하는 사람들을 경시하거나 길을 막는다고 짜증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노인은 너무나도 즐겁고, 가볍고,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 신경 쓰지 않은 채 자신의 일에 몰입한다. 내 눈에는 그 영화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 중에 그 할아버지가 제일 행복해 보였다.
한국에 이런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아이들에게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한국이 청소년 자살률이 그렇게 높은 이유도, 노인 자살률이 높은 이유도, 2030중에 히키코모리가 늘어나는 이유도, 온갖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도, 획일적인 가치체계예 순수성과 자발성을 갖춘 영혼들을 가져다 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왔기 때문이다.
맥락은 이해된다.
한국은 식민 지배와 전쟁, 군부독재라는 수많은 트라우마를 거쳐온 나라이다. 사회적 트라우마는 개인의 몸과 마음에 새겨져, 인생을 결정하고, 자식에게도 유전된다. 한국인들은 정말 불굴의 의지를 가져서, 이러한 사회적 트라우마 속에서도 경제 성장이라는 단일 목표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은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루어냈다.
하나의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그것에 상충되거나 방해되는 모든 가지들을 쳐내야 한다. 잘 살게 되는 것. 한국 사회가 집중한 것은 오로지 그 가치체계였다. 내 집. 내 자산. 내 차. 내 현금. 등등. 경제가 고속성장하는 만큼, 자산을 크게 불린 이들이 늘어났고, 사회는 자연스럽게 경제적 기준에 따라 수직적인 위계가 형성되었다. 명예, 권력 그리고 자본. 세 가지가 어우러지며 어떠한 무형의, 하지만 견고한 계층이 형성되었다.
서구 신자유주의와 한국의 고속 성장의 특성, 한국인과 한국 사회의 특성이 맞물리며, 지난날 숨 가쁜 달리기를 한 대가들이 꾸준히 드러나고 있는 것 같다. 과도 경쟁으로 인한 피로, 낙오에 대한 공포, 평가에 대한 두려움 등. 이것은 중증질환으로, 가족의 파탄으로, 개인의 성격 문제로, 범죄로, 자살과 온갖 자해성 습관으로, 물질에 대한 과도한 집착으로 나타났다. 어떻게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거나, ' 내 집'을 갖는 게 꿈 일 수가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떠돌아다니는 게 편하고, 어떤 사람은 물건이 집에 많이 쌓이는 게 성가시고, 어떤 사람은 가족, 친구, 동물들과 함께하는 게 제일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이 선망하는, 남들에게 자랑할만한 직업, 보여주기 부끄럽지 않은 차와 집, 높은 성적, 안정된 배우자 등으로 많은 이들의 욕구와 재능, 성향은 거세되고 말았다.
한국사회 속에는 '내가 선택한다.'는 개념이 약했다. 우리는 누군가의 후기를 찾아보는 게 익숙하며, 믿을만한 사람의 평가를 보고 결정하는 게 편하다. 그게 사회적으로, 공동체적으로 '공인되고 인정받은'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더 끌리거나, 궁금한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게 결과적으로 '손실을 방지하고, 그래서 안정감을 느끼게 하는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그렇게 많은 민원이 발생하는 것도, 그렇게 많은 재판이 생기는 것도, '내가 손해 보고 있다.'라는 불안. '나의 손해는 나의 가치를 떨어트린다.'라는 공포. '이 조직에서, 공동체에서 비웃음 사게 되고, 그건 내 자아를 말살하는 것이다.'라는 어떠한 오래된 신념들이 작동하기 때문인데, 이 모든 것의 잣대는 결국 '나의 주체성은 힘이 없다.'라는 명제와 연결된다.
선택에는 완전함이 없다.
선택은 선택일 뿐이다.
공부와 숙고를 통해 현명한 선택을 할 수는 있고, 지혜로운 선택도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당시엔 아무리 지혜로워 보여도 10년 후, 20년 후에는 아쉬운 선택이 될 수 있다. 인간이 모든 미래를 통제할 수 없는 게 삶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삶은 살아가는 것은 '나'이며, 삶에는 선택이 끝없이 이어진다. 우리는 매일 하다못해 카페에서 주문하는 음료조차 내가 선택해야 한다. 그래서 선택에 대한 책임은 내가 져야 한다. 그게 내 손해를 불러일으키고, 누군가에게 손해를 주어도, 그것이 불러오는 수많은 감정적 불편감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개개인이 자발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존중하는가?
내 마음이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 타인이 자신의 목소리에 따라 살아가는 삶을 응원하는가?
하고 싶은 게 있어도, 공부를 잘하면 의대를 보내는 나라. 요리를 좋아해서 100만 유튜버가 되면 돈을 많이 버니 응원해 주지만, 요리를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살아가는 삶을 응원해주지 않는 나라. 친구 관계가 어려워도 학원 보내기에 급급한 나라, 가고 싶은 여행지가 있어도 남들만큼은 돈을 모아야 하니 참는 게 미덕인 나라. 스스로 도전해서 실패를 하느니 신점이나 사주로 운명을 파악해서 실패를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나라.
단일한 외적 기준에 맞추어 살아야만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가 있었다.
나의 부모님, 조부모님 세대가 엄청난 절제와 인고의 노력으로 이룬 오늘날의 풍요로움에 나는 자주 경탄하고, 감사하며, 어떻게 이런 집념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그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후손에 대한 애정에 마음이 뭉클할 때도 많다.
한국사회가 경제적으로 얼마나 더 성장할는지 잘 모르겠다만, 지금 한국사회는 전 지구적으로도 충분히 경제적으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30년, 50년, 100년 전보다 개인이 누릴 수 있는 보편적 혜택도 압도적으로 늘었다.
이제는 단일한 외적 기준이라는 허상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내적 기준을 바로 세워야 한다.
내가 무엇에 행복한지, 무엇에 평온한지, 무엇을 도전해보고 싶은지, 한번뿐인 삶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내가 좌절과 타인의 시선을 어떻게 견디며, 내가 하는 반응들의 이면엔 무엇이 있으며, 나는 어떤 상처를 안고 살아왔는지.
내가 행복하고 원하는 길이 있고, 그것이 남을 해치는 일이 아니라면, 기꺼이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설사 그게 공부가 아니고, 좋은 대학도 아니고,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고, 당장 돈을 차곡차곡 모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해도. 사지 멀쩡한 몸이 아니고, 날 좋다는 이성이 없고, 화목한 가정을 갖지 못했다고 해도 말이다.
이 사회에는 남들이 뭐라고 하든,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로 살아가는 어른, 그럼에도 사회와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어른이 필요하다.
나는 이것이 한국 사회가 앓고 있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어린이들, 청소년들 중에는 남들이 뭐라 해도 자기 꿈에 집중하며 삶을 일궈나가려는 반짝이는 존재들이 많다. 이들이 어른이 되면, 아마 사회에 더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을 것이다. 자기만의 삶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일구고 세상과 존재를 사랑하는 어른들이 더 많이 보일 수 있기를, 나 역시 더 많이 그런 존재들과 함께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