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인연의 운용법

사랑하는 나에게

by 무오



나는 배웠다.

나에게 강렬한 감정을 경험시키는 모든 인연은 나와 이번 생에서 처음 만난 게 아니라는 것을.

어쩌면 우리는 까맣게 잊어버렸을 테지만, 오래전, 어딘가에서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카르마라고도 한다.


카르마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지만,

왜 강렬한 감정을 주고받은 관계는 계속해서 서로를 끌어당기는가?

그것은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간에 얽힌 끈을 풀어보려는 의도라고 생각한다.


누가 벌을 주려고 그런 게 아니다.

저주를 받은 것도 아니다.

영혼들끼리의 약속 같은 것이고, 우주의 물리 법칙 같은 것이다.


선한 인연은 여기서 제외하고,

내가 만난 카르마 인연 중 나를 괴롭게 만드는 건 크게 세 가지였다.

진짜 못나고 나빠서 나를 짜증 나게 하고, 화나게 하고, 무슨 수를 써도 고쳐지지 않아 절망스럽게 하는 사람.

그리고 너무 부럽고, 어쩌면 부럽다는 감정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열등감을 느끼게 하는, 잘난 사람.

그리고 그 두 가지가 섞인 사람.


두 번째 케이스의 경우,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내가 누군가를 시기, 질투하고 열등감을 느낀다는 점을 인지하는 것이다.

아마 본능적으로 그의 흠을 잡아서 그의 흠으로 뒷담을 까며 내가 부러워하는 마음을 느끼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 그의 가치를 떨어트리려고 할 것이다.

그 이면엔 내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진 자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그냥 정직하게 부럽다고 해야 한다.

그다음엔 그 사람의 잘난 점을 언어화한다.

"그래. 걔가 그거 하난 진짜 잘했지. 나한텐 그런 점이 없는 게 사실이야."

그러면 두 번째 케이스의 경우, 나의 스승이 된다.

짜증 나고 칭찬 한 번 해주고, 많이 보고 배웠다고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더 좋다.

그러면 내가 보고 배울 수 있는, 아주 멋진 교과서 인연이 된다.

그렇게 나를 더 성장시키고 유능하게 만들면 된다.

카르마 청산!


첫 번째 케이스의 경우가 특히 어렵다.

사실 첫 번째 케이스에 해당하는 사람은 나의 거울이다.

난 안 그러는데? 저런 사람이 날 비춰주는 거울이라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수치스러운 면, 혐오스러운 면을 인정하기 싫어한다.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내가 그런 모습에서 벗어나려고 얼마나 많이 노력했는데 저게 나야?라고 인정하기가 싫어진다.


나는 이 인연을 이해할 때 융의 개념을 차용했다.

개인의 무의식은 정말 깊고 방대하다.

그래서 우리의 무의식은 작은 섬처럼 분열되어 있고 흩어져있다.

만약 개인의 무의식을 1에서 100으로 표현한다고 할 때,

내가 인식하는 과거의 '나'가 16이고, 현재의 '나'가 25라고 치자.

그러면 '1'에 위치하는 나의 무의식 파편은 나랑 정말 멀리 있어 내 모습 같이 안 느껴질 것이다.

50에 있는 나는? 89에 있는 나는? 솔직히 나라고 볼 수 없지 않나? 싶을 정도로 내 모습과 멀 것이다.

그러나 100% 일치할 순 없더라도 일부분 다 우리에겐 있는 면들이다.

불교에서 모든 인연이 연결되어 있다는 개념과도 연결되고, 집단무의식과도 연결되는 개념이다.


만약 소통도 안 되고 피해의식 심하고 인색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으로 인해 온갖 감정을 느끼고 괴롭다고 치자.

그는 나의 카르마 인연이다.

얼굴도 안 보고 인연도 끊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다.

잘 지내보려고 애도 쓰고 퍼줘도 봤는데도 소용이 없다.

그 사람으로 인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실컷 욕을 하기도 할 것이다.

싸우기도 하고, 화를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나에게 보이는, 내가 보는 그의 모습은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나의 일부이다.

그는 나의 거울이기 때문에.

카르마 인연의 미끼는 감정이다. 카르마 인연에서 내가 내 감정을 억압하는 게 아니라 알아차리고 관찰하고 그것을 행동과 태도에 적용하여 조절할 수 있게 될 때, 카르마 청산은 시작된다.


하지만 감정에 휩싸여 알아차리고 관찰하는 것부터가 힘들다.

감정, 욕구와 동일시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짙은 카르마 인연은 성욕을 달고 오기도 한다.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어떻게 해야 카르마 인연을 잘 운용할 수 있을까?


제일 먼저 할 일은, 내 감정을 바라보는 일. 그리고 알아차리는 일. 관찰자에 서는 일이다.

경계를 설정하는 일은 그다음이다.

이 관계가 나를 지지해 주는가? 성장시키는가? 나는 왜 이 행동을 하려고 하는가? 나의 행동이 그와의 관계에 도움이 되는가? 나를 소진시키지는 않나? 그는 나의 행동에 대해 정당한 존중과 대가를 제공하는가? 판단한다.

도움이 되지 않고, 나를 소진시키고, 내가 상대를 통제하려고 했으며, 상대는 나를 존중하지 않음을 알았을 때부터는 경계를 짓고 행동과 태도를 바꿀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할 일은 자비로 바라보기이다.

엥? 싶을 수 있겠지만, 다시 한번.. 그는 나의 거울이고, 그는 나의 일부분이다.

내가 그를 혐오하는 건, 내가 나를 혐오하는 것이다.

카르마 인연 운용법의 모든 전제는 자기혐오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수용의 논리를 배제해서는 안된다.

분명히 모자라고, 부족하고, 미성숙하고, 이기적인 모습이 훨씬 많았을 테지만

그럼에도 저 사람이 저 모습으로 존재하는 건 본인 나름대로는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내 수치스러운 모습 안 보이고 살려고 애쓰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


나는 그랬다.

"아 저 사람.. 저렇게 인색하고 피해의식 심한데도 업무적으로는 소통이 되잖아. 인사하면 맞인사는 하잖아. 그래도 범죄 안 저지르고 살잖아."

좀 우습긴 하지만.. 세상엔 정말 더 나쁘고 더 잔인한 선택을 하는 사람이 많다.

그래도 본인의 부정적인 면을 사회적으로 잘 풀어보려고 애쓰고 있구나. 하고 알아주는 것이다.

이게 자비로 바라보기이다. (예뻐하고 좋아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러면 좀 마음이 느슨해진다. 미워하는 마음도 줄어든다. 내가 분별하고 분리했던 그의 모습을 나를 통합하는 데 활용한 것이다.

그와의 카르마 청산이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여기서 또 어려운 함정이 두 개가 있다.

하나는 상대를 낮잡아 보는 것이다.

나는 네가 애쓰고 있다는 걸 알지. 그걸 아는 나는 우러러볼 대상이고, 너는 모자라고 동정받는 대상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 이것도 내 내면을 교묘하게 분열하는 행위이다. 내 마음에 있는 면들의 서열이 어디 있나? 써먹을 때가 다를 뿐이다.

두 번째는 내 속에서 혼자 그를 용서하고 상대에게 필요 이상으로 호의적으로 구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내면의 성장이 이루어진 것일 뿐, 상대는 변하지 않았다. 심지어 상대는 내가 본인을 자비로 바라보는지, 본인 마음을 다 이해해줬는지도 모른다. 내적 성찰이 잘 되는 사람이었음 이런 짜증을 일으키지도 않았을 것이다. 중요한 건 상대가 내가 베푸는 호의와 사랑을 받고 돌려줄 자세가 되어있는 사람인지 판단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면 예의를 갖추어할 말만 하면 된다. 또 사랑을 퍼주었다가 상처받고, 소진당하고, 하는 것은 나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 아니다. 나는 나를 보호할 자격이 있다.


이 인연과 마지막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정답은 없겠지만, 나는 그라는 존재를 정중하게 대하는 것, 그의 방식이 이해는 안 가지만 존중하는 것, 그리고 안녕을 빌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게 다 이루어지면, 카르마 인연은 끝난다.


카르마 인연은

누군가는 그걸 알아차리고 카르마를 끊어주기로,

다른 누군가는 상대가 그걸 알아차릴 수 있도록 모른 채 존재하기로 약속한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구 하나 더 나은 사람도 더 쉬운 사람도 없다.



지독한 카르마 인연과 종지부를 찍은 기념으로,

글 하나를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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