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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영혼의 믿음

아직 모든 것이 꿈과 희망의 형태로 남아있는 젊은 영혼들의 특권

by 무오


입사를 했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과장이 내게 말했다.

"일의 능력과 경력은 상관이 없어."

현기증이 나도록 긴장 속에 있던 내가 그 문장 하나는 기가 막히게 들었나 보다. 일을 할 때 나는 공공연하게 그 문장을 떠올린다.


무경력자, 쌩신입, 초보자인 나는 어딜 가든 불신 어린 시선을 받고 있다. 사람도 동물도 그렇다. 첫 판에 모든 걸 판단해 버린다. 나의 어려 보이는 얼굴, 직업문화를 체득하지 못한 태도, 전문적이지 못한 표현들을 바탕으로 계산을 끝낸 것이다. 알게 모르게 '네가 뭘 알아?', '네가 정말 할 수 있겠어?' 하는 낌새를 느끼고 있다.


외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20대였다면, 아마 내 에너지를 전부 태워가며 그들의 태도를 바꾸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역시 내가 부족한 거라고, 나 자신을 채찍질하고 몰아세우며, 눈치를 살피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고자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무 한심해서 무너져버릴 것 같을 테니까.


그런데,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음 한 구석에 이상한 신념 같은 게 하나 있었다.


"나는 무언가에 분명한 재능이 있어. 나이와 상관없이, 아주 큰 잠재력이 내 안에는 있어."라는 것이다.


터무니없고 너무 근거가 없어서, 그 신념은 내가 실수하고, 실패하고, 모자라보일 때마다 나의 자아를 거세게 흔들었다. 넌 뭘 믿고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니? 세상이 너보고 아니래잖아. 아무도 너 인정 안 하잖아. 칭찬 안 하잖아. 너 좋게 보는 건 친한 친구, 가족, 상담 선생님뿐이잖아.


모두가 다 이런 신념 하나씩은 가지고 사는 줄 알았다. 그래서 그냥 깨지고 무너지며 배워가는 또래 친구들이 멋있고 존경스러웠다. 나만 이렇게 허약한가 보다. 자책도 많이 했다. 그런데 아니,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아무런 신념도 없었기 때문에, 그 친구들은 유유한 해파리처럼 거센 파도를 탈 수 있었던 것이다.


한 때는 그 신념을 반박하고 무너뜨리려고 노력도 했다. 정신 차려. 네 수준을 알아. 네가 뭐라고 자만하니? 하면서 일부러 스스로에게 호되게 굴어보기도 했다. 그런데 무슨, 그 신념은 사라지지 않고 자꾸 나한테 말을 걸었다.


"아니, 너 진짜 재능 있다니까? 너보다 경력 많고 나이 많다고, 일 잘해 보인다고 해도, 그게 전부가 아니라니까? 한 번 믿어봐."


그놈의 믿음. 자기 신뢰. 지긋지긋한데, 지긋지긋하게 어려운 일이었다. 세상이 인정하지 않아도, 딱 봐도 저 사람보다 내가 부족해 보이는데도 나는 분명히 나만의 빛나는 재능이 있다는 걸 믿는다는 게, 천편일률적인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한국 사회에서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오늘날 살아가는 모든 젊은 영혼들은 알 것이다. 대체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젊은 날의 모든 문제들은 늙으면 해결된다. 주변에 둔감해져서 남의 눈치를 안 보게 되거나, 그냥 세월과 시간의 힘으로 얻는 스킬들로 자존감을 채우면 되기 때문이다. 아, 그럼 실력이 쌓이면 믿음이 생기는 건가? 아니. 실력이 쌓여서 믿음이 생기면, 그건 믿음이 아니지. 결과일 뿐이지.


지구의 몇몇 젊은 영혼들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부족함 투성인데 뭘 믿고 큰 꿈을 꾸는지 모르겠다며 스스로 괴로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분명히 언젠가 성공할 것 같은데, 언제나 실력은 제자리걸음이라 이 믿음이 차라리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분노가 올라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저스의 자기실현경향성처럼, 마음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번 생에 정말로 큰 꿈을 이루려고 마음이 계속 계속 외치는 것이다. 결과가 증명해 주길 바라지 말고,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나를 한 번 믿어보자.라고 말을 거는 것이다. 나 자신을 믿어주는 마음으로 큰 한 걸음을 내디뎌보자고. 젊은 날의 하루하루를 그래도 행동하며 살아내 보자고.


그러니까 젊은 영혼들아, 돈도 없고, 직업도 없고, 인정도 못 받는 것 같지만,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한국의 젊은 영혼들아, 우리 지긋지긋하게 어려운 자기 신뢰를 연습해 보자. 돈을 준다고 해서 만들어낼 수도 없는, 어딘가에서 생산해 낼 수도 없는, 어느 날 마음속에서 태어난 신비롭고 기이한 믿음과 함께 살아보자.


일 좀 해봤다고 신입 무시하고 낮잡아보는 경력자들의 안목이 모두 다 신뢰롭고 지혜로운 것은 아니다. 정말로, 세상엔 그냥 매일 출근하다 보니 위로 올라간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들의 시선은 그렇구나. 그저 인식할 뿐이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 인정과 선망은 알아서 따라올 것이다. 나는 그냥 나를 믿고 걸어가면 된다. 젊은 여행자가 할 일은 그 여정을 위해 신발끈을 단단히 묶는 일.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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