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가 낯부끄웠던 나의 첫 에세이
미래 걱정, 친구와 다툼, 사업 실패, 가족의 아픔, 짝사랑. 세상엔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 많다. 감정의 파도를 피하기 위해 철학, 종교, 강의 콘텐츠를 보며 감정을 달랬다. 정보의 바다를 유람하다 불교 철학을 접하게 되었고, “모든 것은 공하다.”는 철학이 내 마음에 꽂혔다. 모든 것은 공하다. 실제로 힘든 게 아니라 내가 의미를 부여한 것일 뿐이다. 실제로 힘든 것은 없으니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칸트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과도 맞닿아 있는 생각은 진리 같았다. 동서의 고학자들이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내가 의미를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감정이란 부속물에 속박될 필요 없다. 불교 철학을 나름대로 받아들인 후엔 마음이 편해졌다. 특별한 게 없으니, 크게 힘든 일이 없었다. 무한한 우주, 찰나의 시간을 사는 우리 존재가 사소한 감정 따위에 힘들어할 필요 없다.
가족이 힘든 것도 지나갈 것이고, 이별한 사람도 잊힐 것이다. 고통도 곧 무뎌질 것이고, 어차피 인연이 아닌 친구들이 사라진 것일 뿐이다. 철학을 가지고 살면서 힘든 게 줄어들었다. 힘든 것은 허상이고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니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좋은 철학이었지만, 가끔 괴리감이 들었다. 지나가다 보면, 허상인 감정에 슬퍼하고 아파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도대체 왜 그럴까. 친구와 이별해도, 가족의 슬픔에도, 일에 실패해도, 슬플 필요 없는데, 왜 저리 슬퍼할까. 사소한 것에 슬퍼하지? 모든 것이 무의미하기에 남들이 힘든 것도 공감하기 어려웠고, 자신의 감정에도 무뎌졌다.
혼란하던 중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 내 직업의 다른 이름이다. 남들에게 행복을 준다는 슬로건을 내세운 만큼 남의 행복을 위해 노력했다. 많은 사람을 기쁘게 했지만, 뇌리에 박힐 큰 인상은 없다. 애초에 허상에 감정을 유발한 것일 뿐이니 한 편의 기억으로 가슴에 남을 뿐이었다. 이런 자신에게 변화를 준 건 어쩌다 만난 가족 손님이다. 여전히 사소한 것에 행복해하고, 기뻐한 두 사람이 특별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이 손님이 떼를 쓰고 그 아이의 마음을 받아주는 어머니 손님을 보니 순간 과거가 떠올랐다.
부모님과 어린 내가 소소한 일생을 보내던 모습이 투영됐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했구나. 사랑이라는 허상의 감정이 건실한 어른으로 자라는 거름이 됐구나. 이상하게 눈시울이 따가웠다. 따가워진 눈으로 본 세상은 이전과 달랐다. 커플들의 아무 의미 없던 몸짓이 서로를 사랑해서 나오는 행동임이 보였고, 가족 손님이 서로를 바라보는 따듯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세상에는 사소할지라도 사람을 움직이는 소중한 감정과 행동이 눈에 보이니 묻어둔 감정이 용솟음쳤다.
스스로 감정에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아닌 가족의 사랑으로 연결된 것이 자꾸만 가슴에 남았다.
내가 소양이 부족하고, 철학적으로 미성숙한 것일 수 있다. 한낱 감정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게 답답할 지라도 이게 나다. 가끔은 순박하고, 감정적이고, 낙천적이기만 할지도 모른다. 사소한 것에 아파하고 슬퍼하는 내 모습을 누군가 비난할 지라도, 나는 내가 좋다. 우주가 넓고, 찰나의 순간을 살기 때문에 내가 의미 있는 것을 하며 살아야지. 내 일과 감정을 진심으로 대하며 하루하루 충만하게 살자. 감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나선, 따듯한 말로 남의 감정도 따듯하게 하려 노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