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먹기 나름이라면 긍정적으로 살자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의 시각과 인식, 언어와 심리는 과연 객관적이고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주관적이고 변화하는 것일까?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개념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천문학에서의 지동설에서 태양중심설로의 패러다임 전환을 비유적으로 확장하여, 인식론, 언어학, 심리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의 인간의 주관적 해석과 관점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 글에서는 세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의미와 적용 가능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동설이 지배적인 시절이던 당시 움직이는 것은 별이 아니라 지구다.'며, 지동설을 처음으로 주장한 사람이다. 칸트는 이를 바탕으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주장했다. "사물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주관으로 해석하는 것"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빨간 사과가 있으면 그 사과가 객관적으로 빨갛고, 사과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물을 빨간 사과라고 인식하는 것이란 거다.
Episode.1
결국 모든 것은 내가 인지하는 대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알고 있으면,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꿀 수 있다. 세상은 나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것이다. 내가 세상을 부정적으로 본다면, 세상이 객관적으로 부정적인 게 아니라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불교의 일체유심조 사상과 비슷하다. 일체유심조는 '결국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달렸다'는 뜻이다. 내가 싫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내 마음이 그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고, 불편함을 느끼면 내 마음에 불편함이 있다는 것이다. 결코 절대적으로 싫거나, 불편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누군가는 매우 싫어하는 것이라도, 누군가는 매우 좋아하는 것일 수 있다. 두 사람의 마음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마음에 따라 세상이 달라지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세상이 우리의 인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Episode.2
사적 언어
우리는 언어를 통해 소통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에 따르면 언어조차 같은 의미를 전하고 있지 않을 수 있다. 앞에서 말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비추어보면, 언어 역시도 개인이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에 같은 말을 해도 다르게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힘들다'는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일정 수준의 정신적, 신체적 고통을 받아서 일할 에너지가 없는 것'이겠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조금 지친 것'일 수 있다. 사랑한다는 말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고, 에로스, 리비도, 플라토닉 등 개인의 따라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언어 역시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기에 절대적 기준이 아닌 경험으로 축적된 표상일 뿐이다. 언어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언어가 우리의 인식에 의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pisode.3
개인 심리학
아들러는 인간행동의 목적성을 중시했다. 스승 프로이트가 인간의 성격은 유년기 때 정해진다고 말한 것과 반대였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의 좋은 예시이다. 만일 인간의 성격이 유년기 때 형성된다면 변화할 수 없겠지만, 스스로 성격을 만들어 가는 것이라면 변화에 희망을 걸 수 있다. 성격의 주체를 과거에서 지금의 나 자신에게로 돌리는 인식의 전환을 한 것이다. 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면 변할 수 없겠지만, 변할 수 있다면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격에 따라 행동이 달라지는 것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행동이 우리의 인식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정리
이렇게 살펴본 바와 같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은 우리의 인식과 관점, 해석과 표현, 심리와 행동 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개념이다. 우리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통해 세상을 다양하게 바라보고, 이해하고, 표현하고, 행동한 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인간은 개인의 생각을 가지기까지 수많은 영향을 받는다. 우주가 돈다는 사람이 많은 것처럼, 자꾸 잘못된 생각을 주입하는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알아야 한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알면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의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절대적으로 옳은 건 없으니 내 마음에 따라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마음에 따라 세상을 인식하는 게 인간이라면 모든 것에 감사하고, 즐기며 살자. 인간관계든, 세상이든 절대적인 기준에 따라 흘러가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최악의 환경에서도 행복하다고 느끼면서 잘 살지만, 어떤 사람은 최고의 환경에서도 불행하며 살 것이다. 모든 것은 받아들이는 대로, 생각한 대로, 느끼는 대로 흘러간다. 아무리 최악의 사람이라도 싫어하지 말자. 싫어하는 것도 마음에서 나오는 해석인데. 누군가는 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으니까. 마음먹기 나름이라면 긍정적으로 살자.
그럼에도 인간은 온전한 개인이기까지 수많은 영향을 받는다. 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기 때문에 끊임없이 자아보단 타아의 기준에 따르게 될 것이다. 스키마와 인지도식이 있다는 걸 알자.
중요한 것은 남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기준을 알고 그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옳은 건 없으니 적어도 내 마음에 따라 산다면 편할 것이다. 어차피 사람은 주관적으로 산다. 세상에 객관적인 기준이 없다면 내가 기준을 만들자. 좋은 이야기로 듣고, 좋은 생각을 하며 행복하게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