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윙걸즈를 다시 보다.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인 둘째 딸 시영이에겐 여전히 마찬가지이지만, 이제 5학년인 큰 딸 시우가 미취학 아동이던 시절에도 잠들기 전에 꼭 동화책을 읽어주곤 했었다. 하지만 동화책을 읽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때론 내용을 뻔히 아는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읽어주기에 다소 무리가 따를 때가 있다. 그런 마음과 나의 귀차니즘이 합체해서 시작된 게 '내맘대로 이야기 만들기'였다. 대체로 '옛날옛적에...'로 시작되는 이야기들은 내가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보고 읽고 들었던 것들 중에서 웃기는 이야기들의 짜집기였는데 의외로 시우가 좋아해서 꽤 오랫동안 '아빠의 내맘대로 이야기' 시리즈를 들려줬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점에 다달았다. 더이상은 새로운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았지만, 시우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새로운 이야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 때부터 내가 보았던 영화의 줄거리를 약간 아동용으로 편집해서 들려주곤 했었는데, 게중 시우가 가장 열광했던 건 '반지의 제왕 3부작'이었다. 특히 거대한 숲의 나무 정령들에 대한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버렸다. 당연히 영화를 보고 싶어 했으니 이제 겨우 초등학교 저학년인 아이에게 인간족의 왕이 오크족의 머리와 몸통으로 분리시키는 모습들을 보여주기엔 다소 무리가 있지 싶기도 했고, 12세 관람가이기도 해서 '5학년이 되면 보여줄게'라고 말하고 미뤄두었다. 그런데 어느덧 5학년이 된지 반년이 넘었다. 그런데 이젠 더이상 '반지의 제왕'을 갈구하지 않는다. 시우가 어린이에서 소녀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인 것일까?
그 사이 시우는 반지의 제왕은 아니더라도 꽤 많은 영화들-특히 애니메이션-을 보았다.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듯이 입소문이 난 애니메이션은 극장 개봉을 놓치지 않은 편이다. 대부분의 애니메이션이 모두 적당한 재미와 교훈을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무게감이 거의 다 엇비슷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개인적 욕심으로 내가 어릴 적에 보고 큰 감명을 받았던 영화들을 가끔 보여주곤 했다. 어린 소년들의 모험담을 그린 '구니즈'는 초등학교 2학년 때쯤 보여주었던 것 같은데 매우 열광해서 두 번이나 보았다. 그러나 지금 와서 다시 되물으니 '그다지...'라는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스타워즈의 경우는 놀랍게도 그다지 몰입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니 시우는 그 흔한 어벤져스 류의 영화에도 그다지 열광하지 않았다. 이 역시 아무래도 딸이라는 특수성 때문인 것일까? E.T.는 재미 없었다고 한다. 나는 초등학교 5학년 때 그거 보고 울었는데... 재미있게도 몇 년간의 초등학생 시절 사이 보여준 영화들 중에서 시우가 가장 오래 기억하고 가장 크게 재미있었던 영화는 린제이 로한의 어린 시절이 나오는 영화 '프리키 프라이데이'였다. 엄마와 딸이 바뀌는 이야기가 확실히 시우에게 신선하게 다가온 것 같다. 개인적으로 프랑스의 대문호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르셀의 여름(원제는 아버지의 영광이다)'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욕심이었던 것 같다. 보다가 너무나 지루해해서 중단하고 말았다. 대신 쌍뻬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꼬마 니콜라 시리즈는 매우 좋아했다. 나 역시 어린시절 꼬마 니콜라를 책으로 읽고 그 독특한 캐릭터의 아이들과 신나는 이야기에 열광했던 기억이 있다.
5학년이 되면 시우의 생활도 많이 변화되었다. 피아노도 열심히 쳐야하고, 공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의 사이에서 아직은 어린 5학년의 소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어떤 작품이 시우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하여 선택한 작품은 야구치 시노부 감독, 우에노 주리 주연의 '스윙걸즈'였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늘 낙제점이라 여름방학 때 보충수업을 들어야만하는 말썽꾸러기 여고생들이 실수로 기악부 아이들을 단체로 식중독에 걸리게 만들고, 대신 기악부에 들어가 클래식이 아닌 빅밴드 재즈에 도전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이런 스트레이트한 성장기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확실한 매력이 있다. 더군다나 시우는 음악을 좋아하니 소재도 적당하다. 무엇보다도 악역이 없다. 물론 나는 수많은 영화를 편식하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늘 베스트 영화를 묻는 질문에 스티브 마틴의 영화들을 꼽는다. 그 이유는 악역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악역이 없는 영화가 좋다. 그리고 시우도 그런 이야기를 좋아했으면 좋겠다. 스토리에 있어서 선과 악은 필수 요소일 수 있으나, 사람의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있어서는 미리 선과 악을 극명하게 나눌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시우가 악역이 없는 인생을 살길 바란다.
개봉 당시 그해 일본 아카데미 5개 부문을 석권한 작품이다. 작품성이나 재미 면에서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꿈과 노력, 절망과 기쁨이라는 매력적인 키워드를 모두 가지고 있다. 세라복을 입은 소녀들이 열심히 트럼펫을 불고 드럼을 치며 연주할 때 화면에 푹 빠져 바라보는 시우의 모습이 보기 좋다. 나는 옆에서 '저 부분에서 혼자 연주하는 걸 솔로 파트라고 하는 거야. 솔로가 끝나면 박수를 쳐주는 게 매너야'라든가, '저 곡은 매우 오래된 빅밴드 재즈 곡이야.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지 않아?' 등의 쓸데없는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다행히 시우는 고개를 잘 끄덕여 준다.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자 시우가 가장 기억속에 남겼으면 하는 장면은 초반부에 있다. 낙제생 소녀들이 기악부에 들어가 처음 연주를 하기 위해 연습을 하고, 온통 불평불만이던 아이들이 조금씩 음악에 빠져들어가기 시작하는 장면. 그러나 정작 음악에 푹 빠져 제대로 한 번 해보자고 마음먹었을 때쯤 식중독에서 벗어난 기악부 오리지널 멤버들 때문에 악기는 커녕 연습할 공간마저 빼앗겨 학교 밖으로 내쫓기는 바로 그 장면이다. "됐어! 어차피 제대로 할 것도 아니었잖아! 우리가 진심인 줄 알았냐?"라며 쎈척하고 학교 건물을 나오지만 교문 밖으로 채 나가기도 전에 울음을 터트리고 마는 소녀들의 모습이 나는 참 좋았다.
"시우야, 좋아하는 것을 찾는다는 것은 매우 기쁘고 행복한 일이야. 때로는 정말 좋아하는 것 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걸 하지 못할 때도 있어. 그럴 때는 저렇게 잠깐 울어도 괜찮아. 중요한 건, 좋아하는 것을 하겠다는 마음을 끝내 버리지 않는 거야."
낯간지러워서 말하진 못했지만, 시우도 충분히 느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