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 손은 늘 입가에 딱 붙어 있었다.
불안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오물오물 씹어댄 손톱은 개구리 발톱마냥 짧고 뭉툭했다. 겨울이면 살이 쩍쩍 트고 거스러미가 일어나 피를 보는 게 일상이었지만, 아픔보다 싫었던 건 창피함이었다. 남들은 예쁜 매니큐어를 바르고 자랑할 때 난 슬그머니 주먹을 쥐고 숨기기 바빴다.
그 초라한 손톱이 꼭 내 결핍 덩어리 같아서.
스무 살, 알바비를 받자마자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연장 전문 네일샵으로 호다닥 달려가는 것이었다. 당시 열 손가락에 거금 25만 원. 20년 전 물가를 생각하면 그야말로 미친 금액이었다. 강사로 일할 때 수강생이 귀띔해 준 곳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독한 페인트, 아니 시너 냄새가 훅 끼쳐왔다. 미국에서 왔다는 남자 원장님, 낯선 공기, 묘한 냄새. 마치 내가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원장님은 내 손을 보더니 혀를 쯧 찼다. "손톱 바디가 너무 없어서 한 달도 못 버틸 거예요" 그러고는 툭 한마디를 던졌다. "오래 못 갈 거 같으니 15만 원만 받을게요. 대신 다른 사람한테는 비밀" 핀잔 섞인 그 할인 덕분에 쫄았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
그땐 전동 드릴도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원장님은 거친 야스리를 들고 직접 슥슥, 삭삭 쉼 없이 갈아냈다. 투박하게 갈리는 소리와 원장님의 섬세한 손놀림을 보고 있는데 묘하게 기분이 이상했다. 단순히 손톱을 다듬는 게 아니라 상처 난 내 마음을 누군가 정성껏 어루만져주는 기분이랄까. 돈으로 위로를 산다는 게 이런 건가 싶었다.
한참 동안 이어진 그 수작업. 원장님의 손이 바쁘게 움직일 때마다 내 손톱 위에 굳어진 아크릴은 조금씩 예쁜 모양을 갖춰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고된 노동이 빚어낸 손톱은 내 쪼그라든 자존감을 빳빳하게 펴주었다. 더 이상 남들 앞에서 주먹을 쥐지 않았고, 길을 알려줄 때도 보란 듯이 손가락을 쫙 폈다. "내 손 예쁘지?"라고 마음의 소리를 질렀다. 신기하게도 입으로 가는 버릇도 뚝 끊겼다. 마치 딱딱한 아크릴이 "그만 좀 뜯어"라고 말해주는 것 처럼 말이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6개월 정도 후, 손톱이 자라나자 나는 '이제 다 나았다'고 착각했다. 당시엔 젤 네일이 없어서 일반 매니큐어를 발랐는데 20분씩 말리는 것도 귀찮고 찍히는 것도 싫어 관리를 멈춰버렸다. 그러자 1년도 채 되지 않아 내 손은 거짓말처럼 예전의 개구리 손톱으로 돌아가 버린 것이다. 다시 주먹을 쥐고 사는 쭈굴쭈굴한 생활이 시작되고 말았다.
그때 깨달았다. 나에게 관리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걸. 그 후 2007년, 젤 네일이라는 신문물을 만나면서 나는 다시 샵으로 향했고 그때부터는 쉬지 않고 출석 도장을 찍었다.
그런데 진짜 위기는 예고 없이 왔다. 결혼하고 잘 살다가 코로나가 터지면서 수입이 끊기자 제일 먼저 줄인 게 네일 비용이었다. "이젠 나이도 먹었고 이만큼 했으면 버티겠지" 했던 건 내 오만이었다. 관리를 끊자마자 귀신처럼 손이 입으로 갔다.
불안하니까 뜯고, 피 나니까 숨기고
그 꼴을 남편이 봤다. 결혼 초엔 "옷은 안 사 입으면서 손톱엔 돈 쓴다"고 이해 못 하던 양반이었다. 근데 피투성이가 된 내 손가락을 보더니 아무 말 없이 카드를 내밀었다.
"그냥 가서 해. 너한테 이건 사치가 아니네"
코로나 때 남편과 참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나의 오랜 결핍과 상처를 자세히 알게 된 남편은 이제 나의 가장 든든한 코디가 되었다. "자기야, 이번엔 이거 해봐. 이게 자기 손에 예쁘겠다" 이제 그는 내가 네일샵에 다녀오면 누구보다 먼저 내 손을 잡고 예쁘다며 칭찬해준다.
나는 지금도 손톱을 가꾼다. 누군가는 낭비라 할지라도 이것은 구멍 난 마음을 메우고 나를 지키기 위해 내가 필요한 가장 값진 치료제다. 깜찍한 열 손가락을 보며 나는 늘 다짐한다.
나는 이제 다시는 주먹 쥐고 살지 않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