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극의 해피엔딩

by 머머씨

여덟 살, 고모네 집에서 맞이한 첫 겨울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 놀 곳이라곤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그곳에서 낡은 교회 하나는 동네 아이들의 유일한 핫플레이스였다. 헌금 100원이면 달달한 간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었으니 나와 동생도 매주 그 달콤한 유혹을 쫓아 교회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그해 크리스마스, 교회에서는 11월부터 일찌감치 성극 준비가 한창이었다. 동네 꼬맹이 열댓 명 중 유난히 똘망똘망하고 대사를 기가 막히게 외우던 비상한 아이

그게 바로 나였다.

덕분에 나는 아주 비중 있는 배역을 따냈다.

바로 동방박사를 아기 예수에게 안내하는 길잡이 사슴 역!


사실 이 배역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원래 사슴 역은 다른 오빠가 맡기로 되어 있었는데 11월 말쯤 그 오빠가 겨울방학 동안 친척 집에 가야 한다며 하차하게 된 것이다.

덕분에 공석이 된 그 자리는 운명처럼 나의 차지 됐다.

동네 수선집 아줌마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 연극은 의상부터 클래스가 달랐다. 배역이 정해지자마자 우리는 뻔질나게 수선집을 드나들며 가봉을 하고 수선을 했다.

대충 머리띠나 두르는 게 아닌 아줌마는 각자 몸에 딱 맞는 진짜 인형 탈 수준의 전신 형탈을 만들어 주셨다. 코에는 새빨간 루돌프 분장까지 하고 나니 거울 속엔 영락없는 빨간 코 사슴이 서 있었다.

문제는 촉감이었다. 고모가 챙겨준 두꺼운 내복을 안에 받쳐 입었는데도 수선집 아줌마가 무슨 천을 썼는지 온몸이 까슬하고 따끔따끔했다. 우리는 긁지도 못하고 몸을 비비꼬며 대사를 외워야 했다.


드디어 결전의 크리스마스이브

무대 옆 대기실은 말이 대기실이지 성가대 어른들의 가운이 빽빽하게 걸린 비좁은 골방이었다. 작은 창으로 가로등 불빛이 들어오는 그 캄캄하고 냉골인 방에 대여섯 명이 콩나물시루에 콩나물처럼 꽉 끼어 섰다.


"야, 밀지 마. 쉿, 조용히 해"

"너 떠니까 나까지 떨리잖아. 큭큭" ​


우리는 오돌오돌 떨면서도 뭐가 그리 재밌는지 서로 입을 틀어막고 키득키득거렸다. 긴장감과 추위 그리고 언니 오빠들의 하얀 입김이 뒤섞인 그 좁은 골방의 공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되어 당당하게 무대로 나갔다. 그런데 아불싸. 동방박사를 인도하며 멋지게 외쳐야 할 대사가 머릿속에서 하얗게 지워져 버렸다.

​"저기... 동방... 동방... 저기..."

​나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같은 말만 뻐끔뻐끔 반복했다. 당황스러움에 눈앞이 뿌해지고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찰나, 객석을 가득 채운 동네 어르신들이 난리가 났다.

​"어구, 그래서? 동방박사가 어디로 갔댜?"
"아이고, 저 사슴 추워서 입 얼었는가 보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걱정어린 구수한 추임새. 그 왁자지껄한 응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그렁그렁한 눈물을 뚝 멈추곤 목청을 가다듬고는 다시 그 어느 때보다 씩씩하게 대사를 쳤다.

그리고 무대는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 속에 끝났다.


공연이 끝난 후, 교회는 거대한 마을 회관으로 변신했다.


아이들 손엔 과자와 떡과 귤이 들렸고, 어른들 상엔 김이 폴폴 나는 수육과 마른안주, 그리고 초록색 소주병과 하얀 막걸리가 올라왔다.


예수님 태어나신 날에 막걸리 파티라니!!


교회 안 다니시는 동네 어르신들도 "어이, 사슴 이리 와서 고기 한 점 먹어" 하는 그야말로 동네 잔치였다. 어른들이 흥겨워하니 아이들도 덩달아 신이 났다. 뭣도 모르면서 그저 분위기에 취해 다같이 방방 뛰어다녔다.



하지만,

그다음 해부터는 언니 오빠들이 시내 상급 학교로 진학하며 동네 아이들의 참여율이 줄었고 나의 화려했던 성극 경력은 그해 겨울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었다.

​가끔 크리스마스가 오면 생각난다.

매캐한 난로 냄새, 내복을 뚫고 들어오던 그 까슬까슬한 사슴 옷의 감촉, 그리고 골방에서 나누던 우리의 웃음소리들.

​나의 여덟 살 겨울은 그 어떤 명작 동화보다 따뜻하고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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