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렴풋한 기억 속, 우리 집은 동네에서 꽤나 폼 나는 2층 단독 주택이었다. 2층은 세주고 작은 마당과 광이 딸린 집. 부의 상징인 검은색 자개장농까지. 빛바랜 앨범 속 우리는 80년대 호황을 누리던 완벽한 중산층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울에서 마트를 운영하던 젊은 사장님인 아빠와 유치원 선생님이었던 엄마. 접점이 없어 보이던 두 분의 인연은 아빠 마트에 캐셔로 일하던 엄마 친구 애경 아줌마의 소개로 시작되었다.
수원과 화성.. 비슷한 거리. 동향으로 내려와 차린 두 분의 신접살림은 젊은 아빠의 사업 수완과 엄마의 야무진 재테크로 날로 불어났다. 아빠가 퇴근길에 안겨주던 두툼한 현금 다발을 들고 인싸 복부인처럼 동네를 누비던 엄마의 모습은 그 시절 우리 집의 찬란한 상징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 견고해 보이던 풍요의 성벽 뒤에는 지워지지 않는 얼룩이 있었다.
내 위로는 2년 터울로 태어난 지 백일도 채 넘기지 못하고 황망히 떠난 언니가 있다. 이름조차 호적에 마르기도 전에 묻혀버린 우리 집의 비운의 장녀.
자식을 먼저 보낸 죄책감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본인이 짊어졌던 고달픈 한국의 장녀의 삶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엄마는 남겨진 나를 유난스러울 정도로 금지옥엽 감싸셨다.
사촌 언니들은 "고모는 쟤만 예뻐해"라며 시샘 어린 눈을 흘길 때도 엄마는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엄마에게 나는 단순한 둘째 딸이 아닌 떠나간 아이의 몫까지 살아내야 하는 존재이자 당신의 상처를 기어코 보상받아야 할 유일한 인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남들이 부러워하던 그 으리으리한 2층 집과 넘쳐나던 현금 다발
하지만 그 화려함은 어쩌면 채 아물지 못한 엄마의 슬픔과 그로 인한 집착으로 아슬아슬하게 쌓아 올린... 우리 가족의 가장 위태로운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부유했던 그 시절의 사진을 볼 때마다 내 머리 위로 쏟아지던 엄마의 그 슬프고도 무거운 사랑을 떠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