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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호 Jan 06. 2017

초상 – 작은아버지를 떠나보내며


(* 오래전, 2015년 11월에 썼던 글입니다.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이야기죠. *)


오전에 연락을 받았습니다.


작은 아버님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이었죠. 연세도 많으시고 자손들도 다 안정된 상황이라 호상이라 볼 수 있겠지만, 그래도 언제나 가족들에게는 슬픈 일입니다. 저도 찾아뵙고 가시는 길에 술이라도 한잔 올려야겠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작은 아버님은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신 제 아버님의 동생입니다. 친동생이죠. 아버님이 살아 계실 때 해 주신 얘기가 생각이 납니다. 전쟁 때, 즉 6.25 한국전쟁 직후 얘기일 겁니다.


아버님은 그때 이미 소방서에 근무하셨던 것 같고 작은 아버지는 군대에 계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휴가였는지 전역해서였는지 서울에 있는 형이라고 아버지를 찾아온 거죠. 오랜만에 동생이 찾아왔다고 아버지는 마포에 있던 유명한 불고기집(예전에는 불고기가 최고였죠. ㅎㅎ)에 동생을 데려가서 마음껏 먹으라고 했더니.. 동생이 앉은자리에서 10인분을 먹었다는 겁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당시 내 한 달치 월급이 넘었어..라고 하시더군요. 쥐꼬리만 한 소방관 월급도 월급이겠지만, 요즘처럼 150그람도 못되게 쥐꼬리만큼 주는 1인분도 아니었을 텐데 도대체 얼마나 배가 고팠길래 10인분을 드셨을지, 그거 드시고 탈은 안 나셨는지 궁금했더랬습니다.


나중에 작은 아버지에게 여쭤봤더니, 그 기름진 음식을 갑자기 그렇게 많이 먹었는데 왜 탈이 안 났겠냐고 하시면서 껄껄 웃으시더군요. 그러면서도, 그때 먹은 불고기가 내 일생에 걸쳐 먹은 그 어떤 음식보다 제일 맛이 있었다고...


그렇게 이야기를 듣던 제가 놀라자, 아버지는 당시 군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거죠. 병사들 먹이라고 나오는 쌀의 태반은 지휘관이 떼어먹고, 그나마 남은 것은 하사관이 빼돌리고, 쌀이 모자라서 군부대 주변 농부들에게 좁쌀, 기장, 이런 잡곡을 빼앗아다가 쌀에 섞어 밥을 짓는데 그것도 일인당 돌아가는 양이 너무 적어서 군인들은 항상 영양실조 비슷한 상태였었다고 합니다.


전쟁 직후의 국가가 무슨 제 기능을 하겠습니까. 오히려 전쟁 때처럼 군인이라고 뽑아다가 밥도 안 주고 옷도 안 줘서 굶어 죽고 얼어 죽던 국민 방위군 사건 같은 걸 생각하면 무사히 나온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참고로 국민방위군 사건은 아주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0만 이상의 장정이 죽어 버린 끔찍한 사건이었죠.


그렇게 한 달치 월급이 넘는 돈을 한자리에서 먹어치우는 동생을 보고 아버지께서 어떤 생각을 하셨을지 아련하기만 합니다. 그 시절 아버지의 월급이 너무 작아서 우리 집은 무척이나 가난했었거든요. 맨날 구호품으로 나오는 밀가루만 먹었어요. 그 덕분에 저는 어려서부터 점심때에는 맨날 밥도 못 먹고 수제비만 먹어서 지금도 수제비는 돈 주고는 절대 안 사 먹는다니까요.


작은 아버지께서는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하는 형을 찾아와 당시로서는 최고급 메뉴였던 불고기를 원 없이 먹었다는 얘기를 고향에 내려가 얼마나 자랑을 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작은 어머니의 말씀으로는 집에서 고기만 먹었다 하면 그 얘길 하셨다고 하니, 작은 아버지도 어지간히 좋으셨었나 봅니다.


아주 오래전 아버님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일도 기억이 납니다. 작은 아버지가 지키고 살고 계시는 선산에 저희 아버님을 모셨었거든요. 장례식 마치고 시끌벅적한 발인 마치고, 그거 실제로 장의차 타고 가서 산 아래에서 내린 다음 상여꾼들 불러 꽃상여까지 떠메고 올라가 산소에 모셨었으니까요. 저도 꽤 젊었을 때였습니다. 제가 군대 제대한 지 한 달 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까요.


너무 일찍 돌아가시기도 했고, 제가 또 막내이기도 해서 그랬는지 저는 왠지 장례식 내내 한 번 울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상여 지고 가서 미리 파둔 산소 자리에 하관을 하는데 그때 비로소 어찌나 울음이 터지던지 한참을 울었습니다. 옆에서 형들하고 사람들이 막 말리는데 작은 아버지가 말씀하시던 것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저 녀석 여태 한 번도 안 울었으니까, 이제 맘 놓고 한 번 울게 다들 좀 기다리라고."


저는 그렇게 아버지를 떠나보냈고, 허탈해져서 작은 아버지 집 마루 한 구석에 기대고 앉아 멍하니 있었더랬습니다.


그런데 어스름한 저녁이 되자, 작은 아버지가 술 한 병을 손에 들고 어딜 나가시는 거였어요.  따라가 보니 아버지를 모신, 새로 만든 산소 앞에, 이제는 모두 떠나고 아무도 없는 그곳에 가시는 거였습니다.


작은 아버지도 저처럼 장례식 내내 한 번도 안 우셨거든요. 물론 하관식 때에도 말입니다. 작은 아버지 입장에서는 진짜 둘도 없는 친형이었거든요. 군대에서 쫄쫄 굶고 나왔더니 불고기 십 인분을 월급을 탈탈 털어 사주던 형이었단 거죠. 작은 아버지는 산소 앞에 주저앉아 한참을 혼자 계시면서 술을 한잔 따라 마시고 한잔을 산소에 붓고 하면서 계셨습니다.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는 게 조용히 훌쩍이며 울고 계시는 건지, 그냥 술에 취해서 흔들리는 건지 알 수는 없었습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계시더군요. 아마 혼자 조용히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던 형을 떠나보내고 계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멀찌감치서 그 모습을 바라만 보고 있었지요.


저는 그때, 사람이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의 슬픔이란 무엇인지, 인생은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그리고 형제란 무엇인지, 어렴풋한 그 원형을 보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던 작은 아버지가 오늘 새벽에 돌아가셨다는군요. 두 분이 저세상에서 만나셨을지 궁금합니다. 아직 발인을 안 했으니 안 가셨으려나..


그래도 아버지는 이미 그곳에서 동생을 기다리고 계실 것 같기도 하네요.


그냥 울적해져서 늘어놓은 넋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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