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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7. 2024

콰지모도의 종

에스메랄다


콰지모도, 어쩐지 일본 사무라이 이름 같기도 하다. 하지만 알만한 이는 단박에 그를 알아볼 것이다. 소설의 실마리가 된, 숙명이라는 단어가 새겨진 파리의 노트르담 사원. 그곳 종탑에 꼽추인 자신을 깊숙이 숨기고 사는 사나이. 집시여인을 목숨 바쳐 사랑한 노트르담의 종지기였던 그.



외곬의 열정과 지순한 순애보로 하여 다음 생에는 분명 추한 외모 벗고 꽃이나 새가 되었을지 모를 콰지모도. 아니, 그는 어긋진 사랑의 안타까움을 알기에 다시는 허망한 연분 갖고 태어나진 않으리라 서원했을지도 몰라. 어쩌면 한 생애 결결마다에 배인 종소리를 세세생생 잊지 못해, 이승에 환생해서는 애오라지 종소리에 마음 바치는 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세기말적 현상인가, 근자 들어 전생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현대 의학을 전공한 어느 정신과 의사가 펴낸 전생 여행이라는 책이 스테디셀러로 뜨기도 했다. 극히 경솔한 사람만이 지금 유행하는 책에 뒤지지 않으려 한다는 G. 에이드의 말쯤 개의치 않고서.



과연 전생 여행이 가능할 수 있을까. 잠재의식과 직접 교통 하는 상태인 최면에 들게 해 전생 기억을 유도해 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그. 하지만 일각의 반론처럼 단순한 잠재의식의 한 면이거나 환상을 보는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어쨌거나 윤회 이론을 수긍하는 나는 전생을 인정하긴 인정한다. 모태에 깃들이기 전 우리는 어디에 있었던가. 아무도 모른다. 신기한 노릇은, 세상사 기쁨이나 슬픔 따위 알리 없는 갓난아기도 꿈을 꾸며 미소 짓는다. 때로는 놀라거나 삐쭉댄다. 전생의 습(習)이 아니라면 달리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도 모질지 않게 선하게만 살아온 사람에게도 불행은 찾아온다. 태어날 때부터의 불완전함으로 고통받는 이의 비극은 또 어떻게 설명할까. 현재 겪는 부조리와 모순, 갈등과 좌절이 너무 억울하고 도저히 납득키 어려울 때 사람들은 곧잘 전생 타령을 한다. 그렇게라도 전가시켜야만 자신을 달랠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의 연기법에서는 지금의 삶을 통해 전생을 읽을 수 있고 현생에서 짓는 바대로 내생은 결정된다고 가르친다. 결국 내생의 나의 삶을 약속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삶에서 읽을 수 있는 전생. 확연한 실체를 볼 수는 없지만 왠지 친근하게 당기고 마음이 끌리는 어떤 장소, 사람. 데자뷔 현상으로 가벼이 접어두기엔 미진함이 남는 경우, 그 일이 과연 나와 무슨 연관이 있어서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종소리라면 무엇이든 다 좋아한다. 그윽한 범종소리 나 해맑은 풍경소리는 더 이를 나위가 없을뿐더러 그 밖의 어떤 종소리든 다 좋아한다. 이 나이에도 종소리를 듣노라면 가슴이 아리아리해지거나 어느 땐 괜스레 눈가가 싸해진다. 유별나게 종소리를 좋아하다 보니 집안 여기저기에 종을 놓아두었다. 아무 때나 종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다. 부엌 입구에도 창가에도 심지어 베란다의 빨랫줄에까지 종은 매달려 있다. 옷가지를 널고 걷을 때는 물론이고 바람결 따라 딸랑딸랑 소식을 보내는 그 종소리는 여간 매혹적인 게 아니다. 그 소리에 잠겨 있는 동안 나는 세사의 질곡으로부터 잠시나마 자유인이 된다.



종소리뿐만 아니라 종을 닮은 도라지꽃, 은방울꽃, 초롱꽃도 좋아한다. 화려하기보다 다소곳 청초한 꽃, 별의 혼이 고여있는 듯한 꽃들이다. 우리 집엔 그 꽃과 흡사한 초롱 모양의 귀여운 종이며 소방울 꼴의 투박진 종도 있다. 음향 깊은 에밀레종 형태에서 교회당의 꼬마 종까지 생김새도 제각각이다. 대개가 쇠붙이로 만들어졌지만 더러는 유리 종류에 자기 제품도 있다. 내가 돈을 아끼지 않는 것 중 하나가 종을 사 모으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가지런히 진열대를 장식하기 위한 고급스러운 컬렉션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종소리와 더불어 한 번씩 탈속의 경지에 젖어 보거나 범속한 일상 가운데서 나마 맑은 영혼을 꿈꿔보려 함이니까.



누구라도 종소리를 싫어하는 이는 없을 터이다. 하긴 종소리도 듣기 나름으로 소음이 될 수는 있다. 특히 자신의 종교와 상치되는 쪽의 종소리에는 과민 반응이 나오기 일쑤다. 이웃의 절이나 교회에서 아침저녁 치는 종은 분쟁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한발 비켜서서 생각하면 그 역시 은총이 아니던가. 이 종소리에 평화를, 또는 세상 번뇌 죄다 씻겨 지이다,라고 축원하는 소리를 투명한 마음으로 읽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나는 우리 동네 뒤편에 있는 정수사의 종소리에 고마움을 느낀다. 새벽잠 때문에 새벽 종소리는 거의 놓치고 말지만 해질녘인 저녁 여섯 시면 어김없이 울려 퍼지는 은은한 종소리에 매번 마음이 차분해진다. 뎅그렁~ 여운 깊게 허공 중에 잠겨드는 맥놀이야말로 순간 누구라도 숙연하게 만들지 않던가. 동과 서, 서로 다른 음질의 종소리이건만 그 속에서 나는 밀레의 만종을 떠올리기도 한다.



아무튼 종류 가리지 않고 종소리라면 다 좋아하는 내 경우, 아무래도 전전생에서 종과의 인연고리를 찾아야 될 것 같다. 누생의 어느 시절 나는 쇠를 녹여 종을 만드는 장인이었던가. 때맞춰 종을 치는 종지기였을지도 모르지. 혹여 콰지모도였던들 어떠하리. 어차피 육신이란 죽음과 함께 버려지는 낡은 껍질, 무게 때문에 하늘로 데리고 갈 수도 없는 낡은 껍질이라고 어린 왕자는 말했어. 그래, 콰지모도였어도 좋아. 집시여인이 가슴에 자리 잡기 전, 종은 삶의 전부였어. 생명 그 자체였어. 귀가 멀어도 좋았던 오직 하나 나의 사랑이었어. 그때의 습(習)이 남아 이리도 종소리를 좋아하는 건 아닌지.



노트르담 종지기였던 콰지모도의 한줄기 오롯한 사랑을 되새겨 본다. 이루지 못할 사랑, 닿을 수 없는 손길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일심으로 탐닉했던 여인을 위해 죽음조차 마다하지 않은 콰지모도. 절실한 신앙처럼 아니 신앙을 위한 순교처럼 마침내 목숨 기꺼이 내던지는 그. 대부분 사랑은 출발도 방향도 예측불허이고 비원칙적인 것. 사랑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미묘한 바람결로 다가오곤 한다.



그는 비록 추한 꼽추였으나 어느 누가 그의 사랑을 능멸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세상에 존재 의미 없이 태어나는 것은 어느 것도 없는 법. 오히려 외모는 멀쩡해도 정신이 불구인 자 흔해빠진 세상이다. 따지고 보면 누구라도 무엇을 특별히 내세울 게 있으랴 싶다. 더구나 대우주, 대자연의 장엄 앞에 서면 아무것도 아닌 미물, 그래도 다들 저 잘난 멋에 산다. 조금 돋보이는 재능, 어쩌다 거머쥔 금권 혹은 명성을 양껏 과시하며 너 위에 군림하고자 한다. 무슨 일이건 선두에 나서야 직성이 풀린다. 또 하나, 정신 못 차리게 바빠야 사는 것 같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역시 착각은 자유다.



그렇건만 나는 요모조모 짚어봐도 여봐란 듯 내세울 무엇 하나 찾아지질 않는다. 그래도 잘난 게 없다는 주제 파악만은 할 줄 아니 다행이라 할까. 지나친 겸손은 오만이라 했던가. 아니면 자기 비하가 심한 건지 모르겠다. 허나 실제에 있어 콰지모도와 오십 보 백 보다. 오히려 그의 열정은 따라잡을 재간이 없다. 막무가내의 불꽃,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 기꺼이 던져버리는 용기가 정녕 부럽다.



오랜 세월 나는 글을 짝사랑해 왔다. 그 사랑은 늘 은근했고 수줍었다. 적극적이거나 확실하게 사랑을 고백할 자신은 여전히 없다. 그저 남발에 가깝게 쓰고 또 쓰는 게 고작이다. 내가 줄기차게 연모해 온 글을 위해 무엇을 던질 수 있었던가. 아무것도 없다. 마냥 둘레를 서성이기나 할 뿐. 그래도 나의 집시여인은 가끔 응답을 보내고 아는 척도 해준다. 분에 겨운 초대를 할 적도 있다.



그녀에게 나만을 온전히 사랑해 주길 욕심 내선 안 된다. 재능 뛰어난 잘난 사람들이 그녀 주변을 맴도는데 별 볼 일없는 나까지 틈새에 끼려 하다니. 그저 저 멀리서 춤추는 치맛자락만 보여줘도 좋아. 정다운 눈짓은 안 보내도 괜찮아. 그대 거기 있음에 내 삶은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거늘.



아주 먼 옛적, 그대와 나를 하나로 묶은 우리 주검 위에 종소리는 쏟아져 내렸어. 아름다운 소리였어. 축복으로 내리는 종소리에 감싸여 우리 넋은 하늘로 올랐지. 황홀했어. 종소리는 찬란한 빛이었어. 그 순간의 열락(悅樂)을 잊을 수 없어. 한번만, 다시 한 번만 그 순간을 느껴보고 싶어. 그대 향했던 뜨거운 애모의 념, 다시금 품어 안고 이 밤 잠들어 볼까. 어느새 시각은 자정을 넘었다.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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