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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마중은 오륜대에서
by
무량화
Oct 7.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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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동수원지 가까이 아주 바짝 다가가 보았다.
우리 가족이 부산에 살며 십수 년 동안 쓰고 마신 물을 공급해 주던 곳이라 감회 남다르다.
부산 초입 금정구에 자리한 산중 호수이자 시민들의 식수원인 회동수원지 역사는 지난하게 시작됐다.
일제강점기 때 자연부락 넷이 수몰지구가 되면서 만들어진 인공 호수인 회동수원지.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타고 가면서나 먼빛으로 만 보았던 회동수원지는 매양 아득한 풍경이었다.
오륜대 터널을 지날 즈음이나 선동교를 달리다 보면 우측 산등성이 사이로 얼핏 새파란 호수가 보였다.
그렇게 멀리서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던 호수.
당시는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제한됐으므로 근처에 얼씬도 못했다.
금단의 땅이라 아마 길도 제대로 닦여 있지 않았을 것이란 예상대로 지금도 비포장 도로였다.
가톨릭 순교자들을 기리기 위해 만든 오륜대 한국순교자 박물관까지 가면 더 이상의 진입은 금지됐다.
그랬던 곳이 2010년 들어 이 지역이 시민들에게 전면 개방되자 호수 주변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면서 인기 나들이 코스로 변했다.
모처럼 수원지 바로 앞까지 왔지만 관절이 시원찮은 동행이 있기도 하고 오후라 시간 넉넉지 않아 이번엔 수변 둘레길은 걸어볼 엄두도 못 냈다.
하지만 불원간 꼭 다시 찾아야겠다고 내심 굳은 다짐을 놓았다.
한국순교 복자 수녀회 오륜대 수도원도 마침 인근에 있는데, 지난해 카미노길 도반이었던 글라디스 수녀님이 머물기도 해 방문하려던 참이었다.
겸사겸사 올 시월이 다 가기 전, 하늘 맑은 날 골라 오래 걸을 준비 갖춰 배낭 메고 찾아올 곳이 이렇게 하나 더 추가되어 흐뭇했다.
그땐 두꺼비가 산다는 늪지의 연잎도 오래 눈여겨보고 부엉산 전망대에도 올라가 여러 다채로운 풍광을 사진에 담아 올 수 있을 터다.
회동동 동대교-오륜대-선동 상현마을로 이어지는 오륜대 구간(6.8㎞)을 쉬엄쉬엄 걷는 것도 좋겠다.
컨디션에 따라 동대교-아홉산-선동 상현마을로 이어지는 아홉산 구간(12.4㎞)을 걷는 것도 괜찮겠고.
이 코스가 '부산 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아 부산 최고 산책길로 인증까지 받은 명품 산책길이 된 데는 이유가 있다.
45년간 출입이 통제돼 자연환경이 고스란히 잘 보존된 데다 예로부터 절경을 자랑하는 오륜대라는 명소까지 품었기 때문이다.
둘러싼 산세가 너울너울 춤추듯 하고 호수 따라 데크길로 다듬어진 산책로에 오르면 강바람 솔바람 따를 테니 어서 걸어보고 싶은 마음이 급해진다.
특히 조밀한 편백림에 나있는 황토 숲길은 맨발로 걸으며 대지의 정기를 그대로 느낄 수도 있다니 명실공히 매력적인 산책길이 되고도 남겠다.
물빛 푸른 호수와 숲의 청량한 기운 거느리고 천천히 그 길 걸어 볼 생각만으로도 날개 돋아날 듯 겨드랑이가 간질거리며 아리아리 행복해졌다.
가슴 가득 남해바다를 품고 배경으로는 높푸른 금정산과 유장한 물줄기 낙동강에다 동래온천까지 끼고 있는 부산.
수려한 풍광을 자랑하는 부산에는 다섯 개의 아름다운 대(臺)가 있다.
해안가에 자리한 해운대(海雲臺), 태종대(太宗臺), 몰운대(沒雲臺), 신선대(神仙臺)와 내륙에 위치한 오륜대(五倫臺)를 부산의 오대라 한다.
며칠 만에 다시 찾은 오륜대, 뛰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는 호수 저편 산기슭에 우뚝 솟은 바위를 지칭하며 넓게는 회동 수원지 부근 아름다운 경치를 일컫는다.
숲해설가가 내게 질문한다.
오륜대의 오륜은 무슨 뜻일까요?
언뜻 올림픽 깃발이 떠오르나 아무래도 생뚱맞은 연상이기에 답변은 보류한다.
글쎄요? 대신 그녀에게 되묻는다.
삼강오륜의 그 오륜인데요, 당쟁 자심했던 조선시대 때 대쪽 같은 선비 다섯이 산과 계류로 둘러싸인 절경지에 은둔하며 풍류를 즐긴 곳이었대요.
맞은편 산기슭에 기암괴석으로 남은 절벽을 보나 따나 학이 노니는 선경이었으련만 옛 풍치 일부는 물속에 잠겨 버렸고 어언 안목만 높아진 세월이라 빛도 바랬다.
그녀가 사진까지 찍어주었는데 전체 구도도 구도지만 떨어진 낙엽 주워 카메라 렌즈 앞에 대더니 작은 벌레구멍 이용해 절묘한 사진을 남겨주었다.
선동 마을을 떠나 본격적인 갈맷길 걷기에 나섰다.
아침나절에 온 아들 메시지가 외출 시 초겨울 옷을 챙겨 입어야 한다기에 겹겹 껴입어 댄 옷 한 겹씩 벗어가며 스카프도 풀고 강바람 솔바람 즐겼다.
호젓한 듯 휘휘한듯하면서도 아주 적조 치는 않게 마주 걸어오는 사람을 만나곤 했다.
그러나 다들 마스크로 얼굴 가린 채 목례조차 나눔 없는 삭막한 세월이다.
한편 그 덕분에 사색의 시간만은 알뜰하게 누릴 수 있었다.
오륜대를 걸으며 곱씹어 본 오륜,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인 다섯 가지 덕목을 이른다.
도리를 가르치는 도덕이나 윤리가 실종된 사회, 도덕과 윤리는 한마디로 바르게 정직하게 선하게 살라는 말 아닌가.
유교에서 기본이 되는 도덕 지침인 삼강오륜은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 인륜을 칭하는 바, 그중 이 시대에 절실한 君臣有義(군신유의), 義로움의 출발지인 인의예지신(仁, 義, 禮, 智, 信)을 되새겨보며 걷는 갈맷길이었다.
느린 걸음으로 평지만 걷다가 이번에는 해발 175m의 자그마한 산이나 솔숲 길 제법 가풀막진 부엉산으로 올라갔다.
이름대로 부엉이가 둥지를 틀만큼 의외로 산세는 깊었고 하늘로 이어진 듯 층층 계단 휘돌아 오르자 조망터로 손색없는 오륜대 전망대가 정상부에 나타났다.
사방을 굽어보니 발치엔 너른 회동 호수와 수원지 마을이 내려다보이고 앞쪽 저 멀리로는 길게 누운 수원지 지나 춤사위 고운 아홉산 자락과 장산이 잡히면서 아슴하니 해운대 수영 신시가지가 보였다.
방향 바꿔 북쪽으로 돌아서자 호수 건너 금정산 아래 줄 선 아파트며 울멍줄멍 솟은 여러 뫼들과 양산으로 이어진 경부고속도로가 훤하게 드러났다.
낮은 산치고는 360도 어디랄 것 없이 고루 조망권 훌륭했고 더러 소나무 가지에 가리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주렴이듯 운치 있었다.
전 같으면 산꼭대기에만 오르면 야호! 외쳐 댔는데 어쩐지 잠잠하기에 나 역시 야호 대신 심호흡 여러 번 하고는 부엉산 내려와 수변길로 들어섰다.
오륜대 누리길은 수변을 따라 걷는 둘레길 가을 풍광 그윽했으며 호수와 숲길이 조화 이뤄 고즈넉한 초추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었다.
명상의 숲이라 이름한 편백 숲 평상에서 가부좌하고 깊숙하게 복식호흡도 해보고 1㎞에 달하는 황토 흙길을 맨발로 천천히 걸었다.
상쾌한 피톤치드가 전신 마사지를 해주는 느낌이라 편백숲도 좋았고 서늘하니 찹찹한 땅기운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황톳길 맨발걷기는 더더욱 좋았다.
자연 정기 듬뿍 받아 심신 정화시킨 다음이라 세족례 하듯 샘터에 걸터앉아 정하게 발을 씻는데 어느새 잔등에 어룽거리는 저녁 햇살 눈부셨다.
옛 신선은 구름 되셨을 테고 청명한 시월에 오륜대로 초대받은 나, 짙푸르게 펼쳐진 호수 풍경 바라보며 노닌 하루는 신선놀음 따로 없었다.
오래 주춤대며 망설이던 한국행인데 오륜대 걸으며 새록새록 돌아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으니 그 시간이 매우 행복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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