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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8. 2024

아몬드꽃 눈처럼, 아몬드 소낙비처럼


작년 여름 친구의 두 딸내미가 프랑스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가기 전, 자매에게 파리의 노천카페에서 둘이 맥주라도 마시라며 약간의 용돈을 찔러줬다. 다녀와서 건넨 자그마한 선물이 고흐의 'Almond Blossom' 그림이 든 도기 머그잔이다. 머그잔뿐 아니라 그림 액자는 물론 양산에 셀폰 케이스에 블라인드며 커튼 등 실내 인테리어 용품에까지 널리 사용되는 명화인 'Almond Blossom'이다.


평생 동안 고흐에게 헌신적인 사랑과 경제적인 지원을 해주고 수백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던 동생 테오. 그가 결혼해 아들을 낳자 형의 이름을 따서 아기에게 빈센트란 이름을 주었다. 고흐는 축하의 뜻으로 조카의 맑은 눈동자를 떠올리며 새파란 배경에 하얀 꽃이 활짝 핀 아몬드 나무를 그렸다. 1890년 요양원에서 그린 '꽃 핀 아몬드 나무'에는 이처럼 따스한 동기애가 스며있다. 강한 생명력으로 겨울을 견뎌내고 이른 봄 잎보다 먼저 피어난 아몬드꽃을 통해 2월에 태어난 조카의 건강과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마음을 화폭에 담아낸 고흐였으리라.


머그잔 선물을 받던 그때는 물론이고 바로 두 달 전까지만 해도 아몬드 나무는 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수종인 줄 알았다. 아몬드가 나무에서 열리는 줄도 솔직히 몰랐다. 호두를 생각해 보면 유추가 가능할 텐데 막연히 땅콩처럼 땅에서 수확하는 견과려니 생각했었다. 화사한 꽃과 딱딱한 아몬드와의 연결이 쉽지 않았던 때문일까. 하긴 순전히 내 상상력의 빈곤 내지는 무식의 소치다. 꽃은 통틀어 모두 다 flower인 줄 알았는데 과수에 피는 꽃은 따로 Blossom이라 한다는 것도 처음 알긴 했지만.


지난봄 이웃집에서 팝콘 쏟아부은 듯 풍성하게 피어난 향기로운 꽃나무를 만났다. 자두꽃 만발하고 드문드문 살구꽃이 필 무렵이었다. 난생처음 보는 생소한 꽃나무였다. 이름을 물어보니 아몬드 나무라했다. 발음이 유사한가 하고 재차 확인해 볼 정도로 아몬드 나무나 꽃은 내겐 너무도 의외였다. 정말이지 너무 세상이 넓어서 거기 존재하는 동식물의 일부나 알뿐, 평생 보도 듣지도 못할 것 천지겠구나 싶었다. 엊그제 동네 파머스마켓에 짙푸른 열매가 보이기에 매실인가 하고 다가갔더니 명패에 아몬드라 씌어있었다. 풋 아몬드는 소금 절임을 하거나 껍질을 벗겨서 샐러드에 넣으면 신선한 맛이 난다는데 글쎄다.

 
아몬드의 역사는 수천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예로부터 유대인에게 아몬드는 행운을 상징하며 로마에서는 다산 기원으로 아몬드를 선물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원산지는 중동지방으로 4천 년 전부터 재배해 왔다는 아몬드의 한자이름은 편도(扁桃)다. 우리 목 안의 편도도 생김새가 납작한 복숭아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성서에 나오는 아론의 지팡이에서 열린 열매가 바로 아몬드로 ‘편도’ 혹은 ‘파단행(巴旦杏)’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고대에는 편도 나무가 다산을 의미하는 나무였다는데 당시에도 고칼로리 식품임이 인정되었던가 보다. 주로 지중해 연안의 건조한 기후대에서 잘 자라며 프랑스 프로방스 지방 역시 많이 재배하는 나무라서 고흐 눈에 띄었음 직도 하다.


아몬드와 살구, 복숭아는 모두 장미과로 꽃과 잎이 서로 비슷하게 생겼다. 키 8미터 정도의 낙엽교목으로 회색 줄기는 매끈하며 이른 봄에 제일 먼저 꽃이 피는데 꽃잎은 다섯 장, 꽃색은 희거나 약간의 분홍 기운을 띤다. 꽃 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는 거의 복숭아와 흡사하다. 이 열매가 자라 과육이 마르고 나면 밤처럼 자연적으로 터지면서 단단하고 납작한 속씨의 외피가 나오는데 다시 그 안에 들어있는 내피 속 핵과를 우리가 먹는다. 한 열매 안에 하나의 씨앗만 든 경우보다 쌍둥이로 알맹이가 포개진 게 많다고 한다.


원산지를 제치고 아몬드 나무는 미국 서부에서 유사 이래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렇듯 캘리포니아는 세계 아몬드의 80%를 생산하는 곳이다, 여름의 덥고 건조한 날씨, 나무에 알맞은 수분을 공급해 주는 비 오는 겨울이 아몬드 최상의 생장조건이라 한다. 생산량의 70%는 세계 각국으로 수출된다고 하니 전 세계 아몬드 공급처가 바로 캘리포니아이다. 따라서 8~9월이 되면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에서는 진귀한 풍경을 만나볼 수 있다고. 캘리포니아의 뜨거운 햇살에 잘 여문 아몬드 열매가 마치 비 내리듯 나무에서 저절로 떨어진다는데 이를 보고 '아몬드 레인(Almond rain)'이라 한다는 것. 장관을 이루는 개화기 때의 꽃구경만큼이나 소낙비처럼 후드득 열매가 쏟아져내리는 수확기 때도 아주 볼만하겠다.     


땅콩, 호두와 함께 간식용 견과류를 대표하는 아몬드. 나부터도 우유 대신 두유를 마시다가 요즘에는 아몬드유로 대체했듯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아몬드다. 아몬드를 포함한 견과류들은 대부분 산화가 쉽게 된다. 따라서 공기와는 최대한 차단을 시켜서 밀폐 후 냉동 보관을 시킨다. 타임이 선정한 세계 10대 건강식품으로 단백질, 칼슘, 철분, 마그네슘, 칼륨 비타민 B, E 등이 골고루 담겨 있는 아몬드. 견과류 중 가장 많은 식이섬유를 갖고 있는 데다 칼로리도 낮고 콜레스테롤이 전혀 없다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공식적으로 심장마비의 위험을 감소시켜 주는데 탁월하다며 심장 및 혈관 건강과 관련된 아몬드의 효능을 인정한 바 있다.  


아몬드가 사랑받는 이유는 그 외에도 섬유질이 많아서 대장활동을 도와 변비를 완화시키는가 하면 혈당, 인슐린 상승을 낮춰주므로 당뇨 등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는 것. 또한 뇌 활동을 활발하게 해주는 동시에 치매 발병률도 낮춰주어 노인층에 도움이 된다고 하나 많이 먹으면 골밀도를 떨어뜨린다는 보고도 있다. 한방에서는 가래를 삭여서 기침을 멎게 하며 호흡기를 튼튼히 해주지만 몸이 차가워 습담(濕痰)이 있는 사람은 복용을 금하라고 이른다. 아몬드는 껍질째 먹는 게 좋은데 껍질에는 카테킨, 나린게닌 등 다양한 종류의 플라보노이드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플라보노이드는 포도주, 차, 과일, 채소 등에도 함유된 것으로 자연이 주는 가장 강력한 항산화 물질 중 하나이다.​



반면 아몬드(almond)에는 독성물질 ‘아미그달린(amygdalin)’이 들어있다. 아미그달린은 살구씨나 복숭아, 매실, 은행, 비파, 사과, 배 씨에도 들어 있는 시안배당체로 아몬드에서 처음 발견돼 붙여진 이름이다. 아미그달린은 자체로는 독성이 없지만 먹고 난 뒤 장내 효소 활동에 의해 분해되며 시안화수소(청산가리)를 만들어내므로 과다 복용하면 문제를 일으키는 자연 독성물질이다. 아미그달린이 항암작용을 한다는 주장도 있으나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이 물질이 청산중독의 위험이 높다고 경고, 의약품 제조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처럼 아미그달린에서 만들어진 시안화합물은 신경독성물질로서 태아나 신생아에게는 해가 된다. 고로 임산부나 모유 수유 중인 경우는 개량종 아몬드라도 한꺼번에 많이 먹으면 안 된다. 결국 아무리 몸에 좋은 것이라도 무엇이든 과유불급이다.


모든 식물에는 스스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독성을 함유하고 있다. 요즘 한국에서 인기 높은 헛개나무에는 피롤리지딘 알칼로이드라는 물질이 포함, 간정맥 폐쇄성 질환을 일으킨다. 뽀빠이가 먹고 힘을 내는 시금치에는 수산이 들어있다. 비타민 C가 많다는 원추리나물도 제대로 익히지 않은 잎을 잘못 먹으면 콜히친(colchicine) 성분에 중독돼 신부전을 일으킨다. 고사리 잎과 줄기에는 프타킬로사이드( ptaquiloside)라는 2급 발암물질이 들어있으나 쌀뜨물 또는 소금물에 삶아서 하루 우렸다가 말리는 과정을 거쳐 독성을 완화시킨다. 감자에도 솔라닌이라는 독성이 있어 예전 유럽에서는 악마의 음식이라는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안전하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연구되며 식량이 된 감자다. 하지만 덜 익거나 싹이 난 감자는 끓여도 독성이 제거되지 않으며 햇빛에 노출되면 솔라닌과 차코닌이라는 독성 물질이 생성되기 때문에 보관에 주의를 기울여야.



복숭아를 먹고 나서 씨앗을 갈라 보면 마치 아몬드 비슷한 속씨가 보인다. 이 씨앗 안에는 자체적으로 독성이 내포되어 있다. 씨앗이 살아남아야 대를 잇게 되므로 결국 종족보존을 위한 오묘한 생명 법칙이 이 속에 적용된 셈. 행인, 도인이라 하여 한약재로 쓰이는 살구씨 복숭아씨에도 당연 이 같은 독성이 있으나 볶기도 하지만 단일 종목이 아닌 다른 약제와의 적절한 조합을 통해 독성을 약화시켜 병증을 다스린다. 파라셀수스가 모든 약은 독이라 설파한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영약인 인삼 녹용도 아무에게나 보약제가 아니다. 인삼은 열이 많은 체질에는 독이다. 비상도 잘 쓰면 약이 된다 하였다. 뭐든 올바르게 적절히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특히 오남용 하면 독으로 작용한다,   


딸네 눗누런 고양이 이름은 살구다. 살구란 이름이 입에 익어서 인지 어딘가 살갑고 정겨웠다. 전에 강아지를 입양하기 앞서 이름을 살구라 할까도 했었다, 그러나 아서라~ 살구라면 개를 죽일 정도의 상극이 아닌가. 개가 살구를 먹으면 죽는다는데 거기까진 몰라도 살구나무에 개를 묶어놓으면 시름시름거리다 죽고 만다고 한다. 개고기를 먹고 체하면 살구가 직방이듯. 싱거운 잡념이나 풀어놓고 있는 나를 바라보던 강아지도 낮잠에 든 한낮. 입이 궁금하던 차, 머그잔에 아몬드유를 붓고는 마침 아몬드 쿠키가 있기에 적셔먹으니 살짝 버터 맛이 감도는 부드러운 식감이 근사하다. 입이 즐거우면 단세포적인 사람은 만사가 다 아름답고 좋아 보인다. 눈앞 찻잔에는 창천과 대비되는 하얀 아몬드꽃이 피어 하늘거리고....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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